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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06. 2024

매실

매실 재수생의 오답노트

지난 6월 남편이 매실 5kg을 주문했다. 집안에 산뜻하고 상큼한 매실향이 가득했다. 풋풋한 사과향 같기도 하고 모과처럼 독특한 달콤함이 깃든 매실향을 맡으니 초여름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매실로 매실청도 담그고, 매실장아찌도 만들고, 매실주, 매실와인도 담그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매실은 매년 6월경에만 살 수 있는데 이 시기를 조금만 지나도 매실이 익어 황매실이 되어버리고 그 뒤론 구하려야 구할 수도 없다. 작년엔 조금 늦게 매실을 사려고 알아보다 허탕을 치며 매실은 골든타임이 있는 작물이라는 걸 배웠다.

매실이 도착한 날 저녁 바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단 매실을 깨끗하게 씻고 물기가 사라지도록 말. 식탁 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록 매실들이 너무 예뻐 시작부터 설레었다. 다음 물기가 마른 매실의 꼭지 부분을 이쑤시개로 제거한다. 꼭지 부분이 남아있으면 거기서 쓴맛이 나오니 꼭 제거해야 한다. 이쑤시개로 매실똥구멍을 쑤시고 살살 긁어내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그 후 한결 깔끔해진 매실의 씨를 제거한다. 인터넷에 매실 씨 빼는 기계를 사서 하니 정말 편했다. 대충 여기까지 하면 장아찌를 만들기 위한 매실 손질 완료이다. 잘게 자른 매실과 설탕을 1:1로 넣고 며칠간 절이면 매실장아찌가 된다. 처음엔 떫고 시기만 했던 매실이 설탕을 만나 단맛을 한껏 머금는다.


매실 씨 빼기
재밌는 매실 똥꾸멍 쑤시기
나는야 장아찌 될거야~


씨를 빼지 않은 통매실과 설탕을 1:1로 병에 넣고 100일간 재운 후 과육을 빼내면 매실청이 된다. 100일이 지나면 씨에서 독성이 나오기 때문에 꼭 빼주어야 한다. 소화도 잘 되고 음식의 맛도 한껏 살려주는 매실청에는 100일의 기다림이 필요했구나. 늘 주변에서 받아먹기만 해서 몰랐던 매실청에 담긴 정성을 직접 만들어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여기부턴 매실을 매실주로 키우기 위한 남편의 도전이다. 통매실과 설탕, 담금주를 넣고 1년 이상 기다리면 매실주가 된다.(보통 담금주용 소주를 넣는데 남편은 더 특별하게 만들겠다고 비싼 전통소주인 토끼소주와 보드카를 넣었다. 이 부분에 대해 별말 없이 넘어가는 건 남편의 취미에 대한 존중이다.)


매실주는 매실 와인에 비하면 아주 간단한 편이다. 와인을 가정에서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매실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효를 돕는 효모, 알코올 도수 측정기, 기포제거기가 필요하다. 매실을 갈아 효모를 넣어 1~2주 정도 도수를 측정하며 숙성하면 매실 와인이 된다. 여기선 적절한 도수에서 숙성을 멈추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 경계를 넘어가면 식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정확한 발효가 가능한 기계나 설비가 없어도 매실 와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실험실의 박사님처럼 진지하게 연구하는 남편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야 매실주 될거야~


우리는 매실 5kg을 다 손질하고 인터넷에서 찾은 방법 대로, 때론 시어머니께 전화를 해가며 각각의 방식 대로 병에 담았다. 며칠 뒤, 몇 주 뒤, 100일 뒤, 1년 뒤의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우리 자식들은 커서 무엇이 될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부모처럼 우리는 우리의 매실들이 앞으로 어떻게 효도를 할지 설레어하며 그날 밤은 행복에 겨워 잠들었다.


자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듯 매실들도 우리가 기대한 대로 되지는 않았다. 매실청은 설탕을 과육 끝까지 제대로 덮지 않아 윗부분에 곰팡이가 피어 실패했고, 매실와인은 다음날 찬장에서 폭발했다. 매실장아찌는 완성했으나 기대했던 맛이 아니라 영 손이 가지 않으며, 매실주는 1년을 기다리는 중이다.


실패의 원인 : 설탕을 끝까지 덮지 않았다.
폭발해버린 매실 와인


가정집에선 볼 일이 없는 알코올 도수측정기까지 구매했던 시끌벅쩍한 준비 과정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즐거웠으니 나에게는 초여름의 어느 저녁에 매실향에 취해 매실을 손질한 기억만은 행복하게 남아있다.

결국 올해도 시어머님이 주신 매실청과 매실장아찌를 아껴 먹으며 한해를 나고 있다. 이 어려운 과정을 십몇년째 성공적으로 해내신 어머님께 무한한 존경심이 든다.
1년에 한 번 치는 시험처럼 내년엔 심기일전하여 매실 부산물 만들기에 재도전하리라. 매실 재수생의 오답노트는 내년 6월에 다시 열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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