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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

둘째를 낳지 않는 이유

by 소소랍

둘째를 안 낳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안 생긴다, 그런 말은 정말 안생기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하지 않지만 그만큼 적당한 대답이 없긴 하다. 안 생긴다고 말하면 대부분 더이상 해당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나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대화주제를 이어나가는 게 좋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솔직함은 '더 키우기는 힘들것 같아서'요, 다. 아이를 낳고 우울증을 겪었던 것도 사실, 둘째까지 키우기엔 경제적으로나 내 인생을 위해서도 힘든 것도 사실이니까.


난 내 딸이 큰 딸이나 '믿음직한 첫째' 같은 이미지보다 언제나 우리집에서 가장 작은 존재, 내가 돌봐야할 유일한 존재로 있었으면 좋겠다. 7살의 손가락은 1살 혹은 3살의 손가락보다 크고 어른 손에 가깝겠지만 내 딸의 손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작은 손이고 우리집에서 가장 작은 손이었음 좋겠다. 유치를 뽑고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태어날 때의 키 -50센치- 보단 두배 넘게 컸지만 여전히 내 가슴팍도 못오는 아이가 내 손을 꼭 붙잡고 걷는 게 귀여운, 내가 돌봐야할 존재. 내년엔 초등학교에 가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누나 혹은 언니가 먼저 겪을 어려움, 이 아니라 오롯이 내 아이가 처음 겪고 처음 만들어나갈 경험이었으면 좋겠고, 그리고 그것이 내겐 유일한 '학부모가 되는 경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누군가의 누나로, 언니로 규정되지 않고 - 하지만 가장 사랑받는- 그저 한 인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은 아닐지도 모른다.



작년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둘째에 대한 고민을 했더랬다. 엄마가 먼저 겪은 엄마의 죽음이 어떤지 나는 몇십년 후를 걱정하며 지켜봤다. 엄마의 슬픔이 어떤 무게인지, 어떻게 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슬픔이 외삼촌들의 것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마 몇십년 후 엄마가 돌아가시면 그 슬픔은 그렇게 나와 내 형제가 나눠가질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얼마간이 지나면 나의 죽음은, 내 딸이 홀로 질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래서 문득 둘째를 낳아야 하나 고민에 돌입하였다. 아이를 오롯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이를 외롭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미안함에.


몇 달에 걸친 고민 끝에 둘째에 대한 생각은 다시 고이 접어 나빌레라- 보내드렸다. 아이가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니 뚜벅이 라이딩도 바빠졌고 경제적으로도 고민이 된 것도 있다. 이 동선이 두 배가 되고 경제적으로도 두배가 될테고 내 시간은 더 사라지게 될테니까. 하지만 둘째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은 건 내가 '둘째'에 대해 가진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 크다.


나는 딸 둘 아들 하나, 그 시절 전형적인 아들 낳고 싶은 집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집안의 장손이었고 동생은 오래 기다린 집안의 첫 손'자'였다. 그 사이에서 언니와 연년생으로 태어나 예쁘지도 않았던 나는 언제나 둘의 몫을 뺏어먹는 '추가'된 존재 취급을 받았다. 자라면서 닭다리를 맛본 적은 한번도 없었고, 어쩌다 먹었을 때 기름져서 싫다는 말에 엄마가 놀랍게 반색하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미역국, 고사리, 치킨, 멍게, 해삼, 열무김치 같은 것들 중에서 동생이 좋아하는 치킨, 미역국은 삭제되고 엄마는 늘 나를 미더덕 좋아하는 애로 기억하셨다.


내 기억 속의 둘째는 내 존재 그 자체다. 남자가 태어났어야 할 때 그걸 방해한 존재, 혹은 동생으로 인해 우연히 세상에 추가된 생명, 언니와 동생을 키울 때 그 사이에 남몰래 묻어 같이 자라나야 하는 어둠과 침묵 같은.


내 아이를 낳고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 엄마, ㅇㅇ를 낳으니까 너무 예쁘더라. 나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갈 줄 알았거든. 그런데 ㅇㅇ 낳고나니까 더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이렇게 예쁜데, 포동포동해도 그저 예쁜데, 엄마는 왜 날 그렇게 안 예뻐했어?


- 너를 낳았을 땐 사는 게 너무 버거워서 애가 이쁜 줄을 몰랐어. ㅇㅇ(동생)이 낳고나니까 비로소 애가 이쁘더라.


나는 순간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솔직했던 엄마의 대답이 내가 사랑받지 못했음을 확인해주었으니까. 말은 그래도 나를 사랑했을 거라며 애써 무시했던 그 수많은 차별들을. 내가 받은 사랑이 담긴 종지의 크기와 동생이 받은 대접의 크기의 차이를.


그러니까,


내가 아이에게 내 사랑을 온전히 주고 싶다는 말은 그리 대단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그저 겁이 나는 것 뿐이다. 둘째가 태어났을때 예쁘지 않다면 어쩌지, 그럼 나는 둘째로 태어난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마음을 느낄까봐 겁난다. 둘째가 태어났을때, 첫째랑 비교도 안되게 예쁘면 어쩌지, 나는 그럼 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의 마음을 느낄까봐 겁이 난다. 둘째가 태어난다면 피할 수 없이 마주할 어린 시절의 내가 괴롭다. 나의 엄마의 자리에서 서서 어린 시절의 내가 뽀뽀받기를 기다리는 눈빛으로 저 쪽 어딘가에 서있는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도, 그런 나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아이가 순서로 규정받지 않고 자신이 받을 사랑을 온전히 다 받게 하겠다, 는 마음은 대단한 사랑은 커녕, 비겁한 자기애의 발로다. 다만 그런 마음을 아이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했다는 의심을 내 딸에겐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는 의심없이 자라게끔 하고 싶은 것, 고작 이것만이 내가 가진 조그만 사랑이다.



2022.3.21.

페북에 쓴 일기를 고쳐쓰고 브런치에 가져오며 다시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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