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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의 예술상점 Dec 21. 2024

18. 마지막 페이지

온전한 세계를 이루기엔 터무니없이 엉성했다.

어느 날, 네가 불안 속에 잠식된 것을 보았다. 그것은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 때문이었다. 그 말들은 마치 허술한 모퉁이에 버려진 낡은 파편 같았다. 부서진 형체로는 무언가를 꿰뚫기엔 날카롭지 않았고,온전한 세계를 이루기엔 터무니없이 엉성했다.


그런 말들 속에서 누구도 자신을 거리로 내보이지 않았다. 거리로 나아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이미 누구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무기력했다.


광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광장은 누군가의 발걸음으로점철된다. 그 발걸음들은 조심스러운 배려로 샛길을 걷기도 하고, 무심한 움직임으로 누군가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나는 가끔 생각한다. 샛길로 걸어가는 선택이 얼마나 섬세한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러나 섬세함 없이 낙엽을 짓밟으며 나아가는 행위는, 마치스스로를 “살아있다”라고 선언하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방식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삶이 있었던 것일까. 광장 속에서 서로를 스치고 부딪히는 사람들처럼.


과거에 잠긴 이를 잠기게 두라. 그의 과거는 그의 광장이다. 손을 뻗어 끌어내리려는 행위는 그의 고유한 풍경을 훼손하는 일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 잠겼고, 스스로 다시 떠오를 것이다. 때로는 한없이 긴 겨울을 지나야 비로소 봄을 맞이할 수 있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며 자신의 시간을 거치듯, 과거에 잠긴사람도 자신의 계절을 지나게 두라. 그래야만 그는 새로운 가을, 새로운 자신으로 광장 위에 나타날 수 있다.


나의 분노는 때로 광장의 우박과 같았다. 우박은 갑작스럽게쏟아져 모든 것을 묵직하게 때린다. 부드럽게 스며드는 가랑비와는 달리, 단단하고 차가운 결로 마음을 꿰뚫는다. 너는 내 우박을 맞고 말했다. “왜 우박이어야만 했느냐”라고.


하지만 우박이 되기 전 나는 이미 가랑비였다. 너는 가랑비였던 나를 알고 있었지만, 우박으로 변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네가 우박을 무서워했다는 사실은, 너 또한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네 무서움은 나의 안쪽을 향한 너의 시선이었다. 너는 다가왔고, 실망했고, 돌아섰다. 가랑비였던 나를 떠나며 상심을 안은 채로. 그 상심은 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이제 나는 나의 사계절을 광장 위에 부르기로 한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를 이루었던 시간을. 때로는 우박이었고, 때로는 가랑비였다. 태양 아래 찬란히 빛나는 여름이었으며,얼어붙은 겨울이기도 했다. 모든 계절이 모여 나를 이루었고, 나는 그 모든 순간을 살아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특별했던 순간들조차 언젠가는 광장의낙엽처럼 사라질 것이다. 잊히는 일은 슬프지 않다. 잊히는 동안에도 나는 내 계절을 살았으니까. 계절의 무게가 나를 흔들었고,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증언했다.


어느 날, 너에게 말하고 싶다. 잊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광장은 언젠가 비워지고, 모든 창작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 순간을 만든 네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우리 광장과 계절은 영원히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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