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아이고, 안녕하세요.
많이 춥죠?
이 날씨에 여기까지 오신다고 욕보셨네요.
그래도 뭐.. 지금밖에 시간이 안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직도 나는 어린 아이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뉴스던, 수업시간이던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좋다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여름 전, 여름, 겨울 전, 겨울.
이렇게 사계절인 것 같아요.
뭐, 여름 옷, 겨울 옷만 사면 되니
사려는 저도, 팔려는 옷가게들도,
그 옷들도 편하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의 매력은 없다고 봐야죠."
"..."
"예?
아..
바로 직구꽂는 타입이시구나.
아, 괜찮아요.
오히려 좋죠, 뭐.
시간낭비도 안하고.
왼쪽 눈, 제가 칼로 찔렀습니다.
맹인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했거든요.
그 반만이라도 느껴보고 싶었어요.
혀요? 혀도 제가 뽑았죠.
벙어리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나 궁금했거든요.
왼쪽 귀요? 이것도 제가 멀게 했죠.
귀가 안 들리면 어떤 느낌인가 궁금했거든요.
왼쪽 팔이랑 다리요? 이것들도 제가 잘랐죠.
뭘 그렇게 물어봐요, 그냥 궁금했다니까요?
어떤 느낌인지?
봐요, 그래도 이렇게 소통이 되잖아요.
다행히 제가 글은 배웠거든요.
그래서 알게 된 게 있냐고요?
음..
글쎄요..
아니요. 그냥 똑같던데요?
그냥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싸고 싶으면 싸고,
목마르면 물 먹고, 다를 게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줄 좀 풀어봐요.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남았단 말이에요.
죽으면 어떤 느낌일까요?
진짜 저승이란 게 있을까요?
그럼 동양과 서양의 죽음은 왜 차이가 있을까요?
귀신은 진짜 있을까요?
저는요 궁금한 걸 못 참아요.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려요.
그러니 이 줄 좀 풀어주고
이 병원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솔직히 선생님도 궁금하지 않아요?
삶,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
"..."
"아무리 찬란한 삶이었을지라도 결국은 모두가 죽음으로 귀결되니,
어쩌면 우리는 죽기 위해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요.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에요.
제 가족들은요, 다들 참 힘들게 살았어요.
아버지는 공장 잡부에 어머니는 남의 집 식모였습니다.
그 초라한 삶을 사는 두 분께서 고작 저 하나 먹여살리겠다고
쌓인 먼지 마셔가며 남들의 무시와 비아냥까지 감수했죠.
그러다 아버지는 공장 지게차에 깔려 죽었어요.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죽었고요.
타오르던 생명이 끔뻑끔뻑 가물거리는 모습을 보며
그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 후회없이 살았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 하셨을까요?
아니면.."
"..."
"평생 거지꼴로 밥 빌어먹으며 살다가 이렇게 가는구나,
나는 단 한 순간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있었나,
매일을 쳇바퀴에 올라간 듯 아둥바둥 살다가,
이렇게 가는구나, 결국에는.
원통하다, 원통해.
하셨을까요."
"아홉살에 혼자가 되어버린 아들내미가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품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라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가 하고싶은 걸 하다가 죽자.
적어도 죽음만이라도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살자.
적어도.
끝맺음만이라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망한 삶과는 부디 다르게."
"..."
"다행히 공부머리는 있었나봐요, 제가.
고아원에서 눈칫밥 먹으며 공부하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어요.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 들어갔죠.
기숙사, 학교, 기숙사, 학교.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교를 들어가고,
다시, 기숙사, 학교, 기숙사, 학교.
누군가가 나를 수석에서 밀어내면 기숙사에서 쫓겨나 학비를 내야했거든요.
날 지지해주는 친구, 사랑하는 애인, 존경하는 사람.
그딴 것들은 없었어요.
있었는데 밀어낸 건가?
아니면 밀어냄 당한 건가?
친구란 밟고 일어서는 존재.
애인이란 삶에 도움도 안되는,
징징거릴 뿐인 하등 쓸데없는 존재.
존경이라는 말은 고작 사람이라는 것에게 붙일 것이 아니었음을.
세상이 감추어두었던 비밀을 혼자서 알아버린 느낌이었죠.
독하게 살았어요, 정말 지독하게. 또, 고독하게.
좋은 회사에 취직도 했죠.
돌아갈 곳이 없으니 매일 야근의 연속.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코피가 쏟아져서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문득 거울을 봤는데..
이거 참.."
"..."
"거울 속에 있는 건 퀭한 얼굴의 제가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더라고요.
일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다간 두 분이.. 그제야 보였어요.
그 다음날,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왔죠.
6평 남짓한 작은 원룸 하나를 잡았어요.
이제 이 곳은 내 집이자 무덤이다.
소주 2병과 담배 한갑을 사서
그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 갔어요
그러곤 한쪽 흰 벽에 빼곡히 적었죠, 검은 펜으로.
내가 하고싶은 것, 아니,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
"아무것도 없이 휑하던 방 안은 자잘한 물건들로 채워졌어요.
노란 고무줄, 소독용 알코올 솜, 주사기.
초록빛 술병, 고슴도치같은 재떨이.
칼, 바늘, 밴드, 붕대.
물티슈, 휴지, 키친타올.
그거 아세요?
수면제를 먹으면서 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뇌에서 잠을 자게하는 호르몬이 분비가 줄어들다가 결국 나오지않게 된대요.
바깥의 무언가로 몸 안을 채울수록 몸이 점점 비워지는 거죠.
아, 그렇다면 몸을 비울수록 몸은 점점 채워지겠구나.
저는 이런 결말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이렇게 저처럼 생각하지 않을까요?
전 채움 없이 몸 안의 것들을 비우기 시작했어요.
대변, 소변, 눈물, 땀, 토, 피.
몸무게가 25kg 가까이 빠지고
머리카락은 뜯어져나오고, 손톱은 찢어지고 갈라졌죠.
그때쯤 다시 한 번 거울을 봤어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같은..
이게 내 모습이라니.
화가 났어요.
그나마 멀쩡했던 예전 모습이 지금처럼 변한 걸 알아서?
아니요.
눈, 코, 귀, 입.
나는 이것들을 왜 아직도 비워내지 못했을까!
빨리 조치를 취하자.
대신에 몸을 한 번씩 잘라낼 때마다 병원에 가면 병원비가 많이 드니까
깔끔하게 쑤실 거 쑤시고, 뽑을 거 뽑고, 끄집어 낼거 끄집어 낸 뒤에 응급실로 직행하고 한 번에 치료받지, 뭐.
대충 이런 생각?
어떻게 보면 숭고한 선지자의 의지인거죠.
우매한 대중들을 일깨우기 위한.."
"..."
"아, 너무 갔나요?
음..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제 모든 선택의 순간들에서 제가 한 선택들은 정답이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확실한 건 제 선택들이 오답은 아니라는 거죠.
선택.
그 뒤에 따르는 믿음과 행동.
순교자."
"..."
"저는 맹인들을 위해 칼로 눈을 찌르고,
벙어리들을 위해 귀에 끓는 기름을 붓고,
장애인들을 위해 팔과 다리를 잘랐죠.
그 사람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랄까?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응급실을 갔어요.
한번도 안가봐서 그런가, 조금 설레더라고요.
그런데 저를 뭔 미친 사이코로 생각했는지
응급처치 및 수술이 끝나고 깨어나니까
여기 이러고 옴싹달싹도 못하게 묶여있는 거예요, 참나.
이 세상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순교자를 환자 취급하다니.
간호사, 의사. 이 나쁜 연놈들."
"..."
"알아요, 저도.
제가 이상한지 안 이상한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의 범위 안에는 못들어갈 거 알죠.
그런데 그 범위는 누가 정했나요?
정상의 범위 한계를 정해놓은 사람이
존재를 확신할 수도 없는 저같은 이를 보고는 두려움과 공포에 차서 그런 거겠죠.
전 떳떳합니다.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누구의 누구를 겪었더라도
저는 이렇게 됐을 거예요.
운명이라고 해야하나?
"..."
"선생님.
언제나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창고를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창고의 문에 튼튼한 자물쇠를 걸어놓는 거예요.
아무도, 그 누구도, 심지어 본인마저도 들어가지 못하게.
그러고는 그 자물쇠를 기억에서 지워야해요.
누가 이런 자물쇠를 걸어놓은 거야? 하고 진심으로 화를 낼 정도로 말이죠."
"..."
"삶이란 그 무엇을 주더라도 바꿀 수 없는 동시에
그 무엇을 받더라도 바뀔 수 없는 거예요.
그 삶을 살아가는 주도적인 영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평범한 이들은 그렇게 휩쓸리다 죽어버려요.
저도 뭐.. 크게 보면 그들과 다르지는 않은데,
적어도 저는 그 휩쓸림을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으니까,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
"거대한 뭉게구름이 하늘에 실리는 날,
누군가는 구름이 이쁘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곧 비가 올 거라고 생각할 때,
저는 저 구름 위에 날개 달린 것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지독히 아려오는 털갈이를 하는 것들이.
갈수록 커지는 날개를 가진 것들이.
결국 그 날개에 숨이 막혀 죽어버리게 될 것들이.
고작, 그런 것들이."
"..."
"영혼을 몸에 가둬놓지 마세요.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아멘.
쉽죠?"
"..."
"종교들도 말하잖아요.
스스로 몸에 바위를 묶고 강에 뛰어들지 말라고요.
근데, 그게 왜 안돼요?
수많은 바위 중에 하나를 고르고,
수많은 밧줄 중에 하나를 고르고,
수많은 강 중에 하나를 고르고,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고르고.
그 또한 나의 소중한 선택의 자유인 것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요?
저는요, 폐소공포증 있는 사람을 깜깜한 엘레베이터 안에 가둬놓고 싶고요,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을 절벽에서 떠밀어버리고 싶어요.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공포라는 자잘한 것 하나 때문에 세상은 돌아가는 거니까요."
"..."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
아니에요.
피한다는 선택지를 인식하는 순간 발전은 없습니다.
그 공포를 마주하고 서서
눈물 콧물 다 빼고 본인의 오바이트 위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해요.
삶은 그런 거니까요."
"..."
"아, 시간이 다 되었나요?
선생님.
시간에 중독되지 마세요.
물보다 더한 마약이니까."
"..."
"에헤이, 자꾸 일어나려고 하지 마시고.
저도 데리고 나가주셔야죠.
선생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간단해요.
그 노트에,
문제 없음.
이 말이면 돼요.
원하시면 선생님 앞에서 보여드릴게요.
사람 죽는 거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거 아닙니다?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조금씩 부풀던 폐가 쪼그라들고,
소리하나 없이, 완벽히 비워진 몸에
비로소 진정한 영혼이 채워지는 순간을.
그 순간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