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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회사 유니폼 대소동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Feb 05. 2025

요즘은 일부 특정 업종 이외에는 일반 회사에서 여직원들의 유니폼 착용이 드물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그건 매우 흔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니폼이 불편하고 싫었지만 초년생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유니폼을 입었었다. 


당시, 우리 회사에는 SKY 명문대 불문과를 나온 여자 선배 "은아 1"이 있었다.  

옆 부서에는, 지방대 국문과를 나온 비슷한 도래의 동명의 여자 선배 "은아 2"가 있었다.  

둘은 담당 업무도 다르고 팀도 달라서 함께 일하지는 않았지만, 참 자주 둘은 상사들의 대화 속에서 많이 비교되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너무나 월등한 은아 1의 업무능력 때문이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선배들과 상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은아 1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갈파했다. 

아울러 그 칭찬의 뒤에는 늘 "역시 명문대는 달라"같은 편견이 같이 붙어 다녔다. 

한 팀이 아니어서 그 언니의 업무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데, 어느 날 은아 1이 적어 놓은 업무 메모를 우연히 보고,  나 역시도 무척 감탄했던 기억이 하나 있다.

그건 DHL 발송대장이었다. 당시 팀별로 하루에도 여러 건의 DHL 발송물을 보내고, 늘 그 내역을 정리해 두는 대장이 있었는데, 마침 내가 적으려던 그 바로 전에, 은아 1이 발송내역을 적어둔 것이다. 

* 너무 단정한 글씨체 

* 칸에 딱 맞게 정리된 내용 

* 전체 메모의 형태나 각도도 균일해서, 한눈에 들어오는 레이아웃 

나는 그때, 막연히 나도 나중에 은아 1 언니처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은아 2 선배의 별명은 독사였다. 

많은 양의 업무도 척척 해내는 악바리 같은 기질이 있고, 일욕심이 엄청 많다고 소문이 났었다. 

야리야리한 외모와는 달리 근성도 있고 책임감도 강했다. 다만, 후배들한테 커피 한 잔 사주는 법이 없었고, 늘 회사 1층에 있던 조흥은행에 자주 내려갔다. 내 생각으론 아마 통장정리를 자주 했던 것 같다. 


그 해 가을, 회사 대표님이 유럽출장을 갔다 오시면서, 잡지 하나를 사 오셨다. 

이번에 여직원들 유니폼을 새로 맞출 때, 그 스타일대로 맞춰서 입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단정한 화이트 칼라에, 붉은색 버건디 리본이 달린 그런 우아한 스타일의 블라우스였다. 

출처 : 핀터레스트 출처 : 핀터레스트 


그동안 싫든 좋든 다들 입고 있던 유니폼의 개편 소식이 사내에 퍼지자, 여직원들 사이에서 유니폼에 대한 솔직한 호불호가 분출하기 시작하면서, 새 유니폼의 '찬성파'와 '반대파'가 생기기 시작했다. 


반대파의 수장은 은아 1이었다. 

그런 일률적인 복장은 창의성을 방해하고, 개인의 신체 컨디션에 따라 개인복장을 입는 것이 더 편안하며, 

무엇보다도 디자인이나 소재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찬성파의 수장은 은아 2였다. 

사복을 입을 때 들어가는 옷값 비용을 줄일 수 있어 경제적이고, 유니폼을 입음으로써 회사 일원으로서 동질감이 증대되고, 회사의 특징을 담은 옷을 입고 직원들이 일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갈등은 점점 커졌는데, 반대파의 의견에 회사가 상당 부분 기우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유니폼은 점점 없어지는 추세인 것은 맞으며, 우리 회사가 서비스업종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라는 의견, 유니폼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니 그 돈으로 차라리 직원들에게 정장지원비를 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 

출처 : 핀터레스트 출처 : 핀터레스트 

                                                                       출처 : 핀터레스트 


그러자, 찬성파가 다 들고일어나, 유니폼을 폐지하면 업무를 거부하고 한 달간 스트라이크를 하겠다고 했고, 그 총대를 은아 2가 매고 나왔다. 이 행동은 회사의 임원진과 대표님을 매우 자극하는 사건이 되었다. 

실무자인 여직원들이 한 달간 스트라이크를 한다는 '협박'이 결고 작은 일은 아니었지만, 대표님은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그런 행동을 주동하거나 추종하는 직원은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반드시 내리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은아 2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녀를 지지하는 후배들의 수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와 타협하지 않는 은아 2의 행동에, 대표님은 일말의 위로금과 아울러 사직을 권고했다. 

그렇게 은아 2 혼자 회사를 떠나고, 우리는 그 해 가을부터 유니폼을 입지 않게 되었다. 

대신 분기마다 약간의 정장지원비가 나왔고, 각자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고 일했다. 



얼마 후, 그 똑똑했던 은아 1도 혼자 독립해 작은 회사를 차려보겠다고 퇴사했다.  

회사의 임원진들은 그녀를 많이 격려해 줬고, 서로 좋은 관계로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출처 : 핀터레스트 출처 : 핀터레스트 


지금 생각해 보면, 유니폼이라는 문제가 그렇게 크게 투쟁을 할 만큼 큰 문제였나 싶다. 

여직원들 특유의 갈등이 그 옷 문제 하나로 그대로 분출되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회사를 상대로 그토록 강경모드로 나갔던 은아 2 언니의 모습도 기억에 남고, 

그들의 스트라이크 주장에도, 더 의연하게 강경모드로 대응하셨던 대표님의 모습도 인상 깊다. 



그로부터 한 10년쯤 후였나, 나는 상사들과 어느 해외 전시회에 출장을 갔다가, 그곳에서 그때 독립했던 은아 1 언니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너무 활기찬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작지만 꾸준하게 회사를 실속 있게 잘 키워가는 중이라고 했다.  은아 2 언니는 그때 퇴사를 하고 얼마 안 있어 대구로 시집가서 잘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두 은아의 유니폼 소동은, 우리 모두에게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유니폼을 둘러싼 여직원 두 계파의 한판 적벽대전은 그렇게 장렬하게 끝났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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