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그녀는 고졸의 사환으로 입사해 10년쯤의 연차가 쌓인 대리급 직원이었다.
연차만큼이나 이제는 익숙한 업무에 모두가 그냥 편안해하는 그런 직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졸 직원들은 야간대학을 다니거나 방통대, 회사의 허락을 받고 일부는 전문대를 다니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게 특별히 회사의 인정을 받는 결과에 닿지 못하고, 개인만의 성취만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그 고단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분들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녀는 공부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승진이나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한 일 욕심도 없었고, 딱 급여받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다만, 급여를 절약해 돈을 악착같이 모으느라, 도시락을 싸서 다니고, 사내 믹스 커피면 족하는 전형적인 또순이 언니의 모습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 눈에 그녀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성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홀어머니와 사는 무남독녀 딸이라고 했다.
그때가 서른 살이 다 된 나이였는데도, 전직 은행원이셨던 어머니에게 통장 채 급여를 맡기고 용돈을 타 쓴다고 했다. 아마, 험한 세상을 오롯이 둘이서만 기대어서 사는 두 여자의 삶에 대한 굳은 결의, 서로에 대한 깊은 의리와 믿음,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 통장은. 꼬질하게 손때 묻은 인감도장이 통장 비닐커버 안에 꼭 끼워져 있었을 거 같다. 달마다 어머니는 꼬박꼬박 알뜰하게 딸의 적금을 부어주셨을 것이고, 남는 돈으로 두 여자가 아껴가며 생활했을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상계동에 작은 아파트 전세금을 모아 산다고 했다.
얼마 있다가, IMF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우리는 경험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우리 회사는 직격탄을 맞는 업종은 아니었지만, 아침마다 환율 체크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직원을 감원하거나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급여 삭감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국가적 경험으로, 사람들은 평생직장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리고,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미래를 두려워했다.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외화를 타이타닉 외화 한 편을 수입하는데 다 소요해 버렸다는 뉴스들이 나오고, 길거리 신문 가판대에는 "_월 대란설", "_월 위기설" 이런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일간지들이 즐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풍경들로 인해 출퇴근길은 더욱더 을씨년스럽도 우울했던 그때.
어느 날, 그녀가 사표를 냈다.
철저히 100% 자의로 밝은 표정으로 내는 사표여서 모두들 더욱 놀랐다.
그녀는 회사에 뼈를 묻을 것만 같은 성실한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먼 친척분이 돌아가셨는데, 자손 없이 돌아가셔서 상속인 순위가 저희 모녀에게까지 온 거예요.
10억쯤 되는 땅을 상속받게 돼서, 저는 오늘 자로 사표 쓰려고요"
10억을 상속받게 되어서요... 그 말이 전 직원의 뇌리에 맴돌았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대사처럼, 그녀의 대사는 거침이 없었고 극적이었다. (웃음)
즐거운 표정으로 인수인계를 하고 떠나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남은 전 직원들은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