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내게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버킷 리스트 중 하나다.
언젠가 세상의 리듬에 맞춰 각지게 흔들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저 알코올에 의존한 막춤이 전부였다. 타고난 몸치라는 한계가 그 꿈을 막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바리케이트는 더 굳건해졌다. 이제는 속절없는 헐렁한 미련 만 남았지만, 아직도 세 가지 모습의 춤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되는 시는 춤을 하나의 동작이 아닌, 삶의 고뇌와 해탈을 표현하는 예술로 그려낸다. 승려가 추는 춤인 승무는 불교에서의 깨달음과 고요함을 상징한다.
시인은 무속적인 움직임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갈등, 번뇌,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르는 평온함을 형상화한다. 이 춤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울림을 표현하는 것. 마치 자신을 묶고 있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나에게 있어 <승무>는 삶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싶은 해방의 몸짓이었다.
고단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온 여인의 굽은 등을 상징하는 이 춤은, 춤추는 모습만큼이나 내포한 메시지도 강렬하다. 곱사춤은 일반적인 아름다움이나 균형이 아닌, 고통과 왜곡된 인생을 표현한다.
공옥진의 춤은 이러한 비뚤어진 모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그녀의 춤은 불완전함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의 저항과 강인함을 보여준다.
특히 1980년대의 대학가에서 공옥진의 춤은 일반적인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당시 대학가는 데모와 시위가 일상적이었다. 그때 공옥진의 춤은 아픈 청춘들에게 위로와 결의를 안겨주었다. 혼란스럽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녀의 춤은 한 줄기 희망이자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나에게도 이 춤은, 모든 한계에 맞서 꿈을 성취하고 싶은 갈망으로 남아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조르바는 삶의 모든 굴곡을 막춤으로 표현한다. 조르바는 복잡한 철학적 논리나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본능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춤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 조르바는 몸을 흔들며 세상과 자신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을 춤을 통해 보여준다.
조르바의 막춤은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다. 삶에서 맞닥뜨린 좌절과 고통, 기쁨과 환희를 그가 춤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단지 동작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의 기록이다. 그는 어떤 틀이나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느끼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풀어놓는다.
이 막춤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춤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예측할 수 없으며, 즉흥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척이나 깊다.
이 춤은 나에게 있어 그처럼 자유롭게 춤추고자 하는 영혼의 울림이다.
신체의 혈액순환을 촉진해 피부에 산소와 영양분을 보내주니, 맑고 생기 있는 피부 톤을 만들어준다. 또한 신체의 유연성을 향상시키고 근육을 다져주니,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어주고, 체중조절과 지방 연소까지 해주니, 다이어트에도 좋다.
게다가,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엔도르핀을 솟게 해 기분을 고양시켜준다.
이렇게 매력적인 춤, 자유로운 그 몸짓은,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의 시구처럼, 때늦은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알았더라면 나도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춤추는 법을 배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