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하듯 살자> 18화
고독까진 못 되고 조금 외로운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중급반에 입성했다. 어떤 계기로 반을 옮겼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어릴 적 고개를 뒤로 젖혀 어른을 올려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 언제 저만큼 클지 막막했지만 이젠 유년기를 떠올리면 고개를 갸웃거리듯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다 정신 차리니 훌쩍 변해있었다.
마음가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평영을 헤매는 초보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영을 같이 시작한 L의 출석이 드물어졌다. 함께 샤워를 하며 오늘 수업이 어땠는지 떠들 수 없었다. 옆자리에는 친구 대신 모르는 아주머니가 섰다. 홀로 머리를 감던 와중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편 샤워기 쪽 나와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오늘 수업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동작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옛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친구 있는데. 아무도 누른 적 없는 기를 펴려고 심술이 올라왔다.
서로 호감을 갖는 데에 명함이 필요 없다는 점을 수영장의 매력이라고 했다. 내 배경을 드러내지 않아도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귀하니 말이다. 그러나 가까운 이가 그리워지는 순간도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그랬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다. 한 게임을 진득이 하는 편이었다. 유저들이 떠난 채널을 홀로 떠돌 때까지 했다. 먼치킨 캐릭터가 된 듯이 난이도 낮은 맵을 휩쓸고 다니다가, 그것도 지겨워지면 사람을 찾기 위해 광장맵에 들어갔다. 아포칼립스에 등장하는 최후의 인류처럼 목적 없이 돌아다녔다.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유저들이 많이 몰려있는 서버가 있었다. 마침 서버 이전 이벤트가 열렸다. 어릴 적부터 게임을 함께 즐긴 친오빠에게 슬며시 말했다.
“서버를 옮길까 봐. 사람들이 없어서 재미없어.”
“원래 진정한 고수는 혼자 하는 거야. 고독하게.”
고수가 되어가는 중수인 걸까. 고독까진 못 되고 조금 외롭게. 샤워를 끝내고 물기를 닦으며 생각했다.
홀로 살아남기
고독한 고수로 살아남자. 그렇게 결심하고 다른 재미를 찾았다. 경쟁이다.
당시에 FM 강사님께 수업을 받았다. 이전 편(13화 나의 히든 수영 선생님)에서 언급했듯이 기본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주 1회에 재미를 보던 오리발과 스타트를 모두 없애고 기본 영법을 반복하는 데에 집중했다. 극기훈련식 수업이 끝나면 아드레날린이 핑핑 돌았다. 하루 종일 들떠있을 정도였다.
체력이 늘었다. 점차 앞쪽에 서기 시작했다. 순번이 당겨질수록 쾌감이 일었다. 강사님께 ‘앞으로 회원님이 선두로 서세요.’라는 지명을 받기도 했다. 첫 순서답게 보이고자 명시한 바퀴수를 빠짐없이 돌았다. 잠시 숨을 고르면 뒤로 밀려날까 봐 신경 쓰였다. 팔과 다리를 빠르게 휘적였다. 누군가를 앞서는 재미를 오랜만에 맛본 탓에 더 신이 났다. 하루 1,000미터는 기본으로 했다.
수업이 끝나고 샤워를 하던 중이었다. 스마트 워치에 남은 기록을 빤히 보았다. 언젠간 나도 고수라 불릴 수 있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설레발을 떨었다. 다만 벅차진 않았다.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서로 수영이 얼마나 늘었는지, 무엇이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L이 그리워졌다. 애초에 선수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실력 오르는 게 무슨 소용이람. 친구의 빈자리를 향상심으로 채웠으나 그마저도 한계였다. 앞으로 무얼 동기로 삼아야 할까. 어쩐지 재미가 없었다.
새로운 서버, 단톡방
어느 날 강습 중 누군가 얼굴에 물을 뿌렸다. 강사님이었다. 위쪽을 바라보니 손으로 옆 레일을 가리켰다. 중상급반으로 올라가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새로운 반 사람들과 어색하게 인사했다. 한 명이 어서 오라는 듯 상냥한 미소를 보였다. 중하급 레일에 있을 때부터 ‘파란 수모를 쓴 사람’이라 기억한 이였다.
그는 언제나 중상급반에서 맨 앞 순서를 지켰다. 나이는 40대 정도로 보였다. 때 묻지 않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미루어 보아 수영을 오래 했거나 대단히 잘할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의 실력에 심각한 초보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실제로 중상급반은 평균 5바퀴를 더 돌았다. 속도도 훨씬 빨랐다. 15명 이상이 회전하던 레일에서 10명 이내의 회원들끼리 왕복하니 목이 터질 것 같았다. 아직도 더 늘어야 할 체력이 남았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중상반 첫 수업이 끝났다.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중하반 어머님들에게 다가갔다. 어머님들은 웃으며 진급한 반은 어떤지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절하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떨던 중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파란 수모를 쓴 사람이었다.
“이번 주 목요일에 회식이 있는데, 오실래요?”
몇 달 전부터 중급반 단톡방이 생겼다고, 회식을 간간이 진행하고 있는데 관심 있다면 초대해 주겠다고 말했다. 흥미로웠다. 마침 새로운 반이 어색하던 참이고 학업이나 스펙 목적이 아닌 동회회는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먼저 미소를 건네준 이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평소라면 쉽게 넘기지 않았을 번호를 술술 읊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새로운 단톡방에 초대되었다.
낯선 방문을 열듯이 조심스럽게 알림 창을 눌렀다.
<수영 중급>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