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2. 재인(才人)폭포

슬픈 사랑의 노래

by 자화상 Jan 01. 2025

1990년 중반, 대학을 졸업한 해의 봄, 발령을 앞두고 홀가분한 마음과 허전함을 함께 안은 채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 떠나는 것만으로도 삶의 짐이 반은 접힌다. 펼치면 새로운 인생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혼자의 여행은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시간’이다. 난 나에게 계속 물었다. 옳게 살았는지, 또는 열심히 살았는지, 대학을 졸업 후 너는 무엇을 목표로 살 것인지 등,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묻고 스스로 대답하며 걸었다. 특히 이곳(전곡)에서는 그런 물음과 대답이 훨씬 편하고 담담하게 이루어진다. 3월,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길가에 핀 들꽃과 삶에 대하여 차분히 대화를 나눈다.


전곡을 떠난 지 십 년이 훌쩍 지나서야 다시 만난 동창들과 읍내에서 맥주 한잔을 나누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은 술 한잔과 더불어 이내 사라졌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함께 했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함께 놀고 있었다.

삶에 조금은 지쳐 있을 때였다. 그리웠던 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신선한 에너지를 준다. 허름한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재인폭포를 가려고 길을 나섰다. 전곡에서 재인폭포까지는 걸어가기에 만만치 않은 거리이다(약 11km). 하지만 난 여행에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 당시부터 선호했던 방법이다. 그냥 걸었다.


필자는 지금도 어지간한 곳은 걸어서 여행한다. 재인폭포는 전곡에서 적당히 먼 곳에 있어 마음먹고 걷기에는 딱 좋은 곳이다. 사실 재인폭포 자체를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봄의 향기도 느낄 심산이었다.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적당히 내리는 봄비는 마른 마음을 적셔 부드럽게 해 준다. 그리고 뾰족했던 마음속의 무언가를 무디고 뭉툭하게 만들어 준다.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뒤에서 승용차의 경적 소리가 들렸다. 당시만 해도 승용차는 흔하지 않았다. 친구 W였다. 어제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이다. W가 차를 끌고 나를 찾아 따라온 것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 앞의 자전거 수리점에 갔더니 아침에 내가 자전거를 빌리지 못하고 그냥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재인폭포에 갈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겨울 재인폭포 인근


W의 차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재인폭포로 향하였다. 당시 재인폭포는 지금처럼 인공 구조물이 전혀 없었다. 나무 데크(deck)는 고사하고 계단 몇 개만 덩그러니 있어서, 등산하듯 재인폭포 앞으로 힘겹게 다가가야 했다. W와 초등학교 이후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교 시절과 달리, 우리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군대 이야기, 대학 이야기, 여자친구 이야기 등 평범한 젊은이들이 그 나이에 겪었을 여러 이야기를 재인폭포 앞에서 신나게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재인폭포는 이런 추억이 스며있는 곳이다. ‘슬픈 광대의 사랑 노래’라는 전설을 담고 청록색에 가까운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광대가 한 가닥 줄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여주듯, 살기 위한 몸부림을 포기한 듯 폭포 저 아래로 푸른 물을 끝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재인폭포 앞 황화코스모스밭(2024년 가을)

현재 재인폭포에는 관광객을 위한 많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와 출렁다리, 그리고 나무 데크(deck)로 된 길과 주차장, 편의점 등이 재인폭포를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이 편리하게 관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왠지 재인폭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행여 그렇지 못할 것만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재인폭포 입구의 도로에는 옛 표지석 위로 현대식 표지판이 올려져 있다. 전국자연보호중앙회가 1986년에 창립된 것으로 추정해 보면, 옛 표지석은 1980년 후반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재인폭포 표지석과 간판


주차장에 차를 두고 조금만 이동하면 바로 재인폭포를 볼 수 있다. 전망대와 출렁다리에서 내려다보면 재인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비해 변치 않은 것은 재인폭포밖에 없다. 재인폭포 외의 주변 경관이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재인폭포 주변에는 장마로 흙탕물이 된 한탄강이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 저 멀리 한탄강댐이 웅장하게 한탄강 물을 머금고 있다. 거대한 절벽과 그 절벽 사이로 웅장한 소리와 함께 무서울 정도로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한탄강 물이 유유히 흐른다. 한탄강은 언제 보아도 슬픈 느낌이다.

전에 가보았던 남쪽 지방의 강들은 밝은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유독 한탄강은 무섭고 슬픈 느낌이다. 큰 절벽과 거대하고 검은색을 띤 바위들 사이로 흘러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재인폭포 앞 한탄강

재인폭포는 한탄강 주변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재인폭포는 북쪽에 있는 지장봉에서 흘러 내려온 작은 하천이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현무암 주상절리(柱狀節理) 절벽으로 쏟아지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또한, 재인폭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어름치(잉어목 모래무지과의 민물고기)’와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여러해살이풀의 하나)’ 등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폭포의 이름과 관련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 전설은 문헌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옛날에 한 재인(才人)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과 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던 중에 재인이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하자, 마을 사람은 재인의 재주를 믿지 못하고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었다. 재인이 줄을 타고 반쯤 지나가자 다급해진 마을 사람은 줄을 끊어버려 재인은 폭포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두 번째 설화를 살펴보면, 옛날 재인폭포 인근 마을에 금실(琴瑟) 좋기로 소문난 광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줄을 타는 재인이었던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광대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은 원님의 계략이었다. 줄을 타던 남편은 원님이 줄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폭포 아래로 떨어져 그만 숨을 거두었다. 원님의 수청을 들게 된 아내는 원님의 토를 물어버리고 자결하게 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마을은 ‘코문이’가 산 마을이라 하여 ‘코문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 재인폭포가 있는 마을인 ‘고문리(古文里)’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이처럼 재인폭포는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광대 재인과 관련된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재인폭포에서는 다양한 현무암의 특징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주상절리를 비롯하여 하식(河蝕)동굴과 포트홀(하천 침식 지형)을 볼 수 있다.           


재인폭포


「재인폭포」 편의 ‘슬픈 사랑의 노래’라는 부제에 어울리도록 그리움을 주제로 한 짧은 문구를 끝자락에 놓아본다.     

1년 내내 찾아봐도 감정의 깊이에 어울리는 낱말이 안 떠오르던 이, 때로는 미소 지으며 때로는 눈물 흘리며 서로의 마음에 푹 빠져있던 시간,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랑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준 고마운 이, 자신의 넘치는 매력을 본인만 몰라봐서 때로 속상하던, 반면 나도 모르던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마주하게 해 주던 이,
그는 ‘언젠가 이 시간도 잊혀지고 사랑 또 찾아온다 했었지만’ 이제 압니다. 그런 모든 표현이 깊은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사진: choon

#재인폭포 #코문리 #재인 #용암 #친구 #포트홀     

이전 10화 11. 철원 애상(愛想)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