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이과 남자의 과학책 읽기(생물학_02)
도심을 걷다 보면 수많은 사람과 접촉한다.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마주치는 순간에는 사위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사람만이 눈과 머리를 가득 채운다. 앎이 곧 사랑이라 했던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앎이 필수다. “호놀룰루 시의 마노아 로와 오아후 대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멍키포드가 서 있다”(p.117) 는 사실을 호프 자런은 알고 있다. 나였더라면 의미 없이 지나쳐 버렸을 멍키포드라는 나무를 식물학자 호프 자런은 애틋한 사랑의 눈길로 어루만졌을 것이다.
“모든 팽나무의 씨를 강화하는 광물질이 바로 오팔이라는 확실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는 오늘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나는 서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고 호프 자런은 대학원 실험실에서 맞이했던 환희의 순간을 회상한다. 그랬을 것이다, 분명 희열이었을 것이다. 내가 네게서 발견한 그것, 내가 최초로 발견한 너의 그것, 그것은 앎, 바로 관심의 결실.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은 평생을 대학 연구실에서’만’ 생활하는 랩 걸(Lab Girl)이 되기로 했다. 시간은 생명이고 모든 경험은 기회 비용이다. 그렇게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호프 자런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뜬금없지만, 의사였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쿠바 혁명의 게릴라군이 되었던 체 게바라가 생각난다. 체는 말했다. "우스꽝스럽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이 얘기만은 하고 싶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된다. 이 특징이 결여된 진정한 혁명가를 상상할 수는 없다."라고 말이다. 사랑의 대상이 꼭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사랑할 대상은 나만이 안다. 그 사랑이 나를 삶의 혁명으로 이끈다.
1년? 10년? 아니면 50년? 혹은 하루? 사랑에 빠질, 너를 알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은 얼마일까? 인생과는 달리 이 책의 끝은 404쪽이고, 끝나고도 몇 페이지가 덧붙여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 나는 119페이지에 와 있다. 너를 4분의 1쯤 알고 있는 것일까? 살다 보면 사랑은 변화하고(혹은 잊혀지고) 권태와 후회만이 남겨질 수도 있다. 지금, 나는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은 내가 발견하고 획득한 앎이기에 아름답다. 하여 지금 이 순간의 메모를 남긴다. 우리는 늘 과정에 있는 것이고, 충실한 선의의 선택은 그 과정의 끝이 무엇일지라도 지금의 나를 심판하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설명하면서 누군가와 책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에 놀랐다.”(p.90).
나도 이 기분을 바로 너와 함께 하고 싶을 뿐이다. 여기까지 메모를 남긴 후 시간은 또 흘렀다(그리고 이 책을 완독했다). 호프 자런은 같은 책을 두 번씩 읽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두 번씩 읽는 경우가 내게는 드물지만, <랩 걸>은 두 번 이상 선물했다. 일생동안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대상이 있음은 축복이다. 생물학(식물학)으로서가 아니라, 그리고 꼭 과학 연구자로서가 아니더라도, 랩 걸 호프 자런의 삶은 축복이라 믿는다. 그런 랩 걸의 인생을 너와 함께 얘기 나누는 이 순간의 내 삶도 축복이다.
"계속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고, 날마다 벌어지는 나무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누자. 사람들이 눈을 굴리면서 부드럽게 당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주면 만족스럽게 웃음을 웃자. 과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대도 된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다." - 호프 자런, 에필로그
덧말1: 세상의 모든 여성 과학자(그리고 그러한 인생)를 위한 이해와 위로의 책이다.
덧말2: 책 표지가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