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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에누 Dec 04. 2024

[생각과 망상 사이]        인공지능은 만능일까?

진품의 아우라가 그립다!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가끔 데뷔를 원하는 예비 작가들의 소설을 심사할 때가 있는데 컴퓨터로 써 온 원고는 대번에 알아챌 수 있지. 컴퓨터 냄새가 나거든.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젊은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원고지에 쓰고 그다음에 정리만 컴퓨터로 했으면 좋겠어.”


두 작가의 생각을 인용한 글이다. 앞의 글은 김훈의 수필집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일부를 따 왔고 뒤의 말은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가 어떤 언론매체와 나눈 인터뷰의 한 꼭지이다.

 대한민국의 산문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들.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사람치고 이분들의 소설 한 권쯤 안 읽어 본 사람이 있을까?

  <칼의 노래>나 <상도>를 읽은 사람들은 그 독특한 문채와 유려한 입담에 누구 할 것 없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인용된 글에서 짐작했겠지만, 이들 작가의 공통점은 컴맹이다. 한 사람은 연필로, 한 사람은 만년필로 원고지를 메우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아직도 컴퓨터의 도움을 받지 않는 글쓰기가 가능하다니? 그러면서도 그들이 생산해 낸 글의 양을 생각하면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온몸으로 한 자 한 자 밀어서 적어 가는 우직함과, 생각의 궤적을 흐트러짐 없이 문자로 형상화해 내는 달인의 내공이 아니고서야 흉내도 내지 못할 일이다. 당연히 그들의 글에서는 디지털 글자판에서 뽑아낸 글에서는 맡을 수 없는 성찰과 사색의 곰삭은 향기가 난다.

 마우스의 오른쪽 버튼을 클릭해서 복사하고 옮겨 붙이는 성형수술과 짜깁기의 흔적도 있을 수 없다.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챗GPT의 자동복제나 표절, 중복의 개연성도 거의 없다.

 대화형 인공지능은 우리 시대가 출산한 궁극적 창조물이다. 이 요물 같은 발명품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까?

대화형 질문으로 챗GPT가 그린 그림

 방대한 빅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그럴듯한 답을 내놓고 주문한 작품을 뚝딱 만들어 내는 광경에 넋을 놓고 경탄만 해야 할까?

 전대미문의 이 만능기계는 3살짜리 소녀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그려낸다. 몇 달을 걸려도 완성하기 힘든 프로젝트를 단 몇 초만에 결과물로 내놓는다. 판결문과 자기소개서, 논문, 리포트까지 챗 GPT의 영험한 능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인간이 만든 물건에 인간이 압도당하는 시대.
그야말로 불가역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마냥 경계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심기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 괴물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챗GPT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질문을 통한 학습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모범답안의 강박증을 벗어나 좋은 질문을 하는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유태인 엄마들이 학교에 다녀온 아이에게 오늘 무엇을 배웠는지 묻지 않고 어떤 질문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것과 맥락이 닿아있다.

 인조 지능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지만 그 산물은 무엇 하나도 진짜일 수 없다. 컴퓨터로 쓴 글이나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들이 가진 치명적 결함은 아우라의 부재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이미 백 년 전에 발제한 얘기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카메라나 복사기, 영상으로 대량 복제되고 유통되면서 진본의 광휘나 기운을 잃어버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보려 할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감동의 절정을 경험하게 한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를 만나기 위해 미국의 여행코스에는 꼭 뉴욕 현대미술관이 들어간다. 모아이의 석상을 남태평양의 외딴섬 이스트의 황혼 녘에 마주하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버켓리스트 중의 하나다.

  메타버스 속의 부캐는 절대로 현실의 본캐를 대체할 수 없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은 찌질한 현실보다 더 리얼한 황홀경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가짜가 진짜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인공적인 것이 만든 어떤 짝퉁에도 진본이 뿜어내는 영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만든 글이나 그림에는 연필을 깎고 먹을 갈아서 쓴 글씨나 물감과 안료로 정성껏 그린 수채화에서만 맡을 수 있는 진품의 향기가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진본의 아우라를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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