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슬래브 지붕과 하얀 흙벽돌의 정갈한 집들이 코발트 색 바다에 떠있는 그림 같은 도시마을.
시간마다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천상의 음악을 연주합니다.
광장의 뚱뚱보 비둘기들은 지구촌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흘린 음식들을 포식하고 있었지요.
성벽 곳곳에 늘어져 자고 있는 개와 고양이들은 이곳의 권태와 안일을 보여주는 시그니처 풍경.
오전 내내 요새의 성벽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내렸어요. 9월의 폭양은 트래킹을 하는 여행객을 쉽사리 지치게 만드는 폭군의 위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쾌청해서 더 뜨거운 초가을 햇빛에 얼굴을 그을린 나그네들은 마치 순례길에 나선 비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힘겨움이 역력한 행로 속에서도 간간이 성자와 같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인증샷을 찍기도 했습니다.
고된 보행을 완수한 보상으로 찾아든 해변의 부자(Buza) 카페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여행 후일담을 검색해서 세심하게 찾아낸 힐링 포인트였지요.
지중해의 윤슬 위에서 요트와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물멍에 빠져들기 좋은 최적의 휴식처였습니다.
젤라토 한 컵과 레몬 비어 한 병이면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한 시간의 만찬이었어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 엄마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히잡 속에 수줍은 얼굴을 감춘 이슬람 아가씨들도 낯선 도시의 정경에 한껏 들떠 있었지요.
허니문 여행을 왔다는 신혼부부는 한시도 손을 놓지 않고 연신 입맞춤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올리브 나무와 사이프러스가 길 따라 서있는 숙소 근처의 언덕길을 오르다 잠깐 발걸음을 멈추어 섰습니다.
지중해 바다로 빠져드는 석양을 배웅하는 최소한의 예의와 의식이었지요.
2. 플리트비체
간밤에 잠을 설친 것치고는 머리가 맑고 몸도 개운하네요.악몽이 꾸어질 만한 고단한 하루였는데 이 또한 지나가네요.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장엄한 폭포소리에 파란만장한 하루가 씻겨 내려간 듯합니다.
조금 쌀쌀한 공기에 잔뜩 흐린 날씨가 오히려 걷기에 좋았지요. 6시간 보행의 출발은 그랬는데 중반 무렵에 번개와 천둥이 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지요. 세 시간 정도는 세찬 빗줄기 속에서 걷다가 마지막엔 부슬비로 변하더군요.
그래도 좋았어요. 영화 아바타의 배경으로 선정된 이유가 충분한 에메랄드 빛 호수에 드리워진 푸른 산과 파란 하늘, 세찬 폭포소리는 궂은 날씨 속에 오들오들 떨면서 강행한 트래킹의 충분한 보상이었지요.
인근 소도시에 미리 잡아놓은 에어비엔비로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자동차 사고만 없었다면 마지막 스케줄까지 완벽했을 텐데...
모든 게 그렇지만 지나가고 나면 예기치 못한 해프닝은 세렌디피티가 되고 특별한 추억이 되는 법.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딸이 운전하는 렌터카 뒷좌석에서 잠시 졸고 있는데 콰강 하는 소리와 함께 뒷쪽에서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어요. 운전하는 딸과 조수석에 앉은 아내의 비명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추돌사고였어요.
이마와 어깨가 앞 좌석 등받이를 들이받은 다음에야 간신히 팔을 뻗어 튀어나가는 몸을 붙들었어요. 앞자리에 앉은 식구들이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시트벨트 덕분에 다들 큰 불상사는 없었던 듯.
반사적으로 차문을 열고 뛰쳐나가니 우리 차를 기습한 뒷차의 보닛은 찌그러져서 들려 있고 라디에이터에서는 연기가 풀풀 나고 있었지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뒷 차 안을 보니 운전석과 조수석 에어백이 다 터져 있더군요. 운전석에 앉은 여성은 혼비백산해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정신이 나가 있고 중동계 동유럽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뛰쳐나와 무조건 큰 소릴 지르더군요.
갑자기 차를 멈추면 어떡하냐는 소리 같았어요. 어이가 없더군요. 나도 맞대응을 했지요? 무슨 소리냐고. 일단 큰 소리로 기선제압을 하는 건 만국 공통의 교통사고 대처법일까요?
딸과 아내의 얘긴즉슨, 우리 앞에 가는 차가 비보호 좌회전을 하느라 깜빡이를 넣고 멈춰 서 있어서 우리 차도 멈출 수밖에 없었대요. 뒤따라 오던 여성 운전자가 미숙인지 부주의인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우리 차를 때린 상황이었던 것 같더군요.
사고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상대가 기세 좋게 경찰을 부르는 사이 우리는 영사관과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요.
현지인과 외국인과의 분쟁에서 입을 수밖에 없을 불이익에 생각이 미치자 엄청난 불안이 압박했지만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고 성격도 침착한 딸이 해결을 주도했어요.
의사로 일하는 딸은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의 유럽여행에서 친구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쓰러졌을 때 실습으로 배운 심폐소생술로 응급조치하고 현지 영사관에 연락해서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옮겨 위기를 넘긴 경험이 있었어요.
경험보다 더 확실한 자기효능감의 근거가 없음을 평소에 확신하고 있어 내심 든든하긴 했지요. 하지만 이번 케이스에서 크로아티아에 나가 있는 대사관과 영사관 직원이 낯선 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난감해하고 있는 재외 한국인에게 정확하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현지인과 외국인과의 사이에서 그래도 크로아티아 경찰은 공정하더군요. 먼저 운전자들의 음주여부 측정을 한 다음 동영상과 사진을 보고 양쪽 얘기를 다 듣고 주변 사람들의 목격증언을 듣더니 100퍼센트 상대방 운전자의 과실을 판정하더군요.
"We are one hundred percent guilty"라는 가해 상대방의 승복을 받아내기까지 족히 한 시간은 걸렸던 것 같네요. 우여곡절 끝에 부슬비가 내리는 이국의 도로에서 사건수습은 마무리되었어요.
물론 렌터카 수리비와 새 렌터카 비용은 상대방 보험으로 해결될 거고. 치료비도 청구할 수 있겠지만 딸의 만류와 다음날 출국 스케줄도 있고 해서 병원행은 포기했지요.
거의 폐차 직전의 렌터카를 인근 레스토랑 주차구역에 옮겨놓고 우리는 픽업 나온 에어비엔비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지요.
너무 춥고 배고프다는 나의 엄살에 웰컴 드링크로 마티니 세잔을 내준 주인아줌마는 천사였어요. 방 두 개와 거실, 욕실이 정갈하게 정돈된 숙소는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궁전이었고요.
지끈지끈 아픈 머리와 욱신욱신 쑤시는 어깨를 달래느라 진통해열제를 한알 삼키고 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어요.
빗길에 우리 일행을 남겨두고 끝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택시를 불러 떠난 가해차량 남녀의 무례함에도 뒤늦게 화가 치밀었어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도 식구들이 아프다면 치료는 어떻게 받아야 하나? 귀국을 연기하고 입원이라도 해야 하나? 차량 충돌이 야기한 법적 충돌과 문명 충돌로 생각이 번져가기 전에 잠이 들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은 좀 설쳤지만 아침이 밝아오자 정신은 씻은 듯이 개운하더군요.
문 밖에선 도란도란 주인장 부부의 대화가 들리고 창 밖에선 짹짹짹 크로아티아의 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서울에서 챙겨 온 카누 커피를 끓여서 훌쩍거리는 그 시간은 여느 아침보다 평화롭고 여유로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