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쩌면 자존감이 점점 떨어지는 나를 위안하는 힐링 추억담일 수 있겠다. 찌질한 백수생활의 현실도피일 수도 있겠다.
브루나이의 엠파이어 호텔. 별 기대 없이 관광지 중의 한 곳을 생각하고 가족과 동행했다. 딸의 통 큰 배포가 서려있는 야심 찬 투어플랜에 무임승차한 것이다. 두바이의 버즈알아랍 호텔과 더불어 세계에서 단 두 곳밖에 없는 칠성급 호텔이란 것도 가서야 알았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었고 진정한 럭셔리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브루나이는 보르네오 섬 북쪽에 자리 잡은 작은 왕국이다. 울창한 숲과 평화로운 풍경, 그리고 따뜻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이 아직도 떠오른다. 절대왕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술탄의 현명한 통치 덕분에 국민들은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간다. 세금은 낮고,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풍부한 자원과 광활한 삼림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번영하고 있다. 사람들의 미소 속에서 이 평화와 번영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왕국의 중심에는 부드러운 힘과 품위로 국민을 이끄는 왕실이 있다. 왕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라의 상징이다. 왕실의 장엄함과 절제된 우아함이 나라 전체에 스며들어 있고, 그 영향은 국민의 일상 속에도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술탄이라 불리는 왕은 단지 통치자가 아니라, 국민들의 평온한 삶을 보장하는 존재다. 그래서 국민들은 술탄에 대한 깊은 존경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왕실을 존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존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황금빛 대리석과 빛나는 샹들리에로 가득한 로비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웅장함 속에서도 묘하게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느릿하게 걸어 다니는 투숙객들은 마치 에덴동산에 들어온 듯 천천히 주변을 음미했다. 직원들은 한결같은 미소로 맞아주었다. 하나같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에서 왕실 전용으로 탄생했던 이 호텔이 지향하는 높은 품격이 배어 나왔다.
엠파이어 호텔에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꿈결 같았다. 창밖으로 코발트색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객실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나시 레막 같은 현지 요리부터 유럽식 미식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조식을 즐겼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호출만 하면 제시간에 맞춰 찾아오는 버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친절한 기사들은 늘 여유로운 미소로 맞이했고 손님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호텔 곳곳에서 만나는 직원들의 서비스는 단순한 응대가 아니었다. 마치 오랜 친구가 내 집에 초대해 주는 듯한 따뜻함이 묻어났다. 풀사이드에서 시원한 칵테일을 건네주는 웨이터부터, 도시에서 숨겨진 명소를 추천해 주는 컨시어지까지, 모든 상호작용이 진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녁이 되면 호텔의 잘 가꿔진 잔디밭을 천천히 산책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지점에서 발길을 멈추고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 심신을 맡겼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저녁 하늘은 점점 연보랏빛과 분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브로나이의 매력은 화려한 부나 재물이 아니라, 평화롭고 고요한 자연 속에서 오는 지극한 평온에 있었다.
건물에 딸린 수영장마다 다른 풍경이 보이고 눈길 닿는 곳에는 늘 새로운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저녁 무렵 호텔 야외 정원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서서히 넘어가면 남중국해가 핑크빛 하늘을 반사하며 끝없는 평화를 안겨주었다. 그 순간, 가족들과 나눈 아무 말 잔치는 일상에서의 그것과는 뭔지 모르지만 결이 달랐다.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미슐랭급 식사를 하면서 브루나이 전통 음식과 이국적인 향신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영화 <음식남녀>의 한 장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요리가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삶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다가왔다. 특히 예상치 못한 호텔 셰프의 환대는 감동을 주었다. 투숙객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이벤트 메뉴를 서빙하면서 "이건 브루나이에서만 맛볼 수 있어요"라고 미소 지을 때 느낀 따뜻함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마치 <화양연화>처럼 특별한 사건 없이도 서서히 마음에 스며드는 감정들이 쌓여갔다. 호텔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작은 대화, 가족과 해변을 걷던 중 나눈 소소한 이야기...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브루나이에서의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호텔의 화려함에 압도되기보다는 그 속에서 느낀 따뜻함과 사람들의 진심이 이 여행을 더욱 기억에 남도록 해주었다.
5일 동안의 편안함과 안락함에 빠져들면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브루나이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엠파이어 호텔은 단순한 숙소 그 이상이었다. 시간과 장소가 마치 맞춤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매 끼니, 매 대화, 그리고 고요히 흐르는 그 순간들이 모여 인생에서 잊지 못할 여행의 조각조각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