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지구가 탄생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인류가 막 출현한 원시시대 내가 살고 있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다른 동물보다 나는 조금 더 진화한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해가 막 뜨기 전 이른 새벽
안개 가득한 밀림 속
움막에는 아내가 잠들어 있다.
아내 품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물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나무와 돌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무기를 들고 움막을 나서 사냥터로 나선다.
사슴 같은 동물부터 매머드 같은 큰 동물들로 드넓은 밀림 속은 생동감 넘치는 사냥감으로 가득하다.
동료들과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다행히 가족이 하루를 견딜 수 있는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먹잇감을 들고 돌아와 가족에게 나눠주고 뿌듯해한다.
몸에는 사냥을 하다 난 생채기가 여기저기 있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원시 시대에도 가장으로서 남자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터에 나가 먹잇감을 구하는 것이었다.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해도 원시시대 때부터 시작된 남자로서 삶의 본질은 동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이 모든 것이 생명과 관련된 일이다.
기술, 문명, 문화가 발전한 것도 인간 DNA 보존을 위해, 생명 유지를 위한 행위가 아닐까.
현대의 사냥터는 더 복잡하게 진화되었다.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번듯하게 차려입고 사냥터에 나선다.
주어진 목표 달성을 위해 모두가 날 선 의식으로 서로를 대하고, 혹은 팀워크라는 미명하에 집단 논리를 강요하는 사회
나의 20대 사회 초년병 시절에 그러한 환경이 매우 낯설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청춘들이 낯설어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지 않을까.
남자들은 이 과정을 겪으며 성인으로 성장하고 역할을 찾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경제활동으로 그 사냥을 대체했다.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그 경제활동, 사냥터에서 먹잇감을 구하는 그 활동은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그러나 나의 20대 시절, 그 힘겨운 삶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좀 더 쉽게 가고픈 마음이 있었고, 그것이 내면의 불만과 갈등을 부추겼으며, 그것이 고통이 되었다.
그때는 힘들다는 생각이 다였다.
인간이 힘들 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남 탓이다.
처한 어려움을 심리적으로 가장 쉽게 벗어나는 방법이 남 탓이다.
나의 20대에도 남 탓을 했다.
힘들 때 나를 돌아보기보다 남 탓을 했다.
그때는 그랬다.
특히 부모에 대한 불만이 컸다.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힘겹게 산 그들을 탓했다.
부모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요즘 말하는 흙수저의 비애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씩은 가난의 때를 벗지 못한 그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보면서, 장남인 내가 잘 살아내야 한다는 용기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남탓하려는 생각과 마음을 대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부모나 형제 혹은 지인이나 그 누구에게도 입 밖으로 내어 외부로 발산한 적은 없었다.
머릿속 생각으로만 그쳤을 뿐, 그 부정적 에너지를 외부 그 어떤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고 혼자 속으로 삭였다.
그러한 상념에 빠져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생각은 생각이고, 할 일은 할 일이며, 어렵지만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자는 단순한 모토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그런 나약한 나를 잡아준 것이 무엇이었나?
딱히 종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심오한 철학을 가지고 인생을 인내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질 나이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어려운 환경이 한편으로 살아내는 힘이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읽은 마이클 싱어의 '될 일은 된다'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듯하다.
'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나 자신을 내려놓고 중심을 잡기 위한 기회로 사용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내가 중심을 잡는 재료로 활용해서 앞으로 나갔다.
그때 만약 그러한 불만과 원망에 휩싸여 그 부정적 에너지를 말과 행동으로 표출하고 살았다면, 지금 나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거란 것은 확실하다.
중력은 항상 우리를 밑으로 밑으로 한 없는 심연으로 끄집어 내리는 경향이 있다.
현실적 어려움은 나에게 중력으로 작용했고, 끊임없이 나를 끌어내리려 했다.
그 중력에 맞서 20대 혈기로 저항하고 버텼다.
나의 20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 그래도 가야 할 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