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일기장을 열어보며
20대를 돌아보면 생각나는 단어들이 있다.
가난, 방황, 불안, 초조 그리고 생명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나의 20대는 그랬다.
그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과 더불어 살았다.
가난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금과 비교하면 소수였다.
요즘과 달리 비교할 대상이 적다 보니, 비교하는 마음도 적었고, 시기심과 질투심도 적었다.
어찌 보면 물질적으로 부족했으나 정신적으로 사람들은 더 건강했던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20대와 다르지 않게 삼십여 년 전 나의 20대도 불안과 방황이라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정신적 방황으로 점철된 20대였다.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의 20대는 어찌 보면 비슷한 과정을 겪는 것 아닌지.
일면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리라.
고단했던 서울 자취 생활 동안, 살아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일기를 썼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일기를 썼다.
그렇게 차고 차곡 쌓인 20대 일상, 생각, 마음의 기록들이 몇 권의 일기장으로 남았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서른 살이 되면서 1997년 초 결혼을 했다.
결혼하면서 짐을 정리하다 펼쳐본 일기장을 다시 읽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혹시 아내가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나의 부끄러운 과거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일기장들을 서류봉투에 넣어 풀로 붙이고 서명을 해서 유리테이프로 밀봉했다.
혹시 누군가 열어 보았다면 표시가 나게 서명을 하고 닫아 버렸다.
어릴 적 워크맨 녹음기로 목소리를 녹음해서 내가 들어보면 닭살이 돋아 듣지 못한 경험이 있다.
내가 나를 매우 어색하게 생각했던 경험.
그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내가 쓴 일기장이지만 너무 유치했고, 부끄러웠던 20대를 기록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보관해 둘 요량으로 봉투에 넣어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그 일기장은 서류 봉투에 밀봉된 채 작년 초까지 30년 조금 덜 된 시간 동안 이삿짐에 실려 이곳저곳으로 나와 같이 옮겨 다녔다.
20년 전 해외 주재 발령을 받고, 해외 이주하면서 물 건너 같이 이동했고, 주재국 인도의 첫 번째 도시 뉴델리에서 10년 동안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마다 이사를 다니며 다른 짐들과 섞여 있었다.
그리고 십 년 전 인도 현지에서 회사를 옮기며, 뉴델리에서 벵갈루루로 삶의 무대를 다시 옮겼다.
참으로 긴 거리를 나와 같이 옮겨 다녔다.
2020년 코로나 봉쇄령으로 벵갈루루에서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짐들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일기장 봉투를 꺼냈다.
지난날 그토록 부끄러워했던 20대 기록을 어찌해야 하나 망설였다.
용기를 내어 30년 만에 서류 봉투를 열고 나의 20대를 들여다보았다.
지방에서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직장을 구해 올라가, 낯선 서울 살이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위로하는 글들.
가끔은 술 한잔하고 늦은 밤,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로 갈겨쓴 술기운을 빌려 쓴 낙천적인 글도 군데군데 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내가 그토록 부끄러워했던 20대 기억들을 30여 년이 지나 다시 들여다보니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나의 20대에 쓴 글들 중 상당 부분이 지금 50 중반 나이에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록해 두지 않았으면 막연하게 부끄러워했을 나의 20대를 그냥 그런 줄 알고 기억 저편으로 착각하고 보낼 뻔했다.
20대에 생각했던 것들과 지금 50대 중반 나이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그토록 닮아 있을까?
나의 20대는 살아가는 동력을 얻기 위해, 어떤 외부의 힘에 의지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특히 유명한 교수들이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묶은 책들을 많이 읽었다.
책을 꺼내 다시 들여다본다.
연필로, 붉은색 볼펜으로 밑줄 친 부분들을 읽어 본다.
일기장을 30년 만에 다시 열어 읽을 때와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밑줄 친 부분들이 지금 내가 책을 읽으며, 또 생활하며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 가치관, 생각들과 상당히 많이 닮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성숙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20대의 생각이 시련의 시기, 고난의 과정, 성공 경험 등으로 다져지거나 무르익어 50대가 되면 좀 성숙해 보이는 면모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20대의 나는 지금 50대의 나와 너무나 많이 닮아 있다.
어찌 보면 이상할 정도로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도 하게 된다.
이 조그만 사건이 글을 쓰고자 결심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0대를 지나 50 중반이 된 지금까지 나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보는 작업이 필요했다.
20대의 나는 50대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