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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일과 사랑

사랑을 찾는 길목에서...

by 디제이K Jan 15. 2025

1990년대 초반

신입사원으로 한창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큰 흐름을 따라가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불안했다.


불안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했다.

우선 처음 배치받은 부서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임무가 주어진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막연하나마 좀 더 큰 일을 하고 싶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첫 번째 도전이었다.


수출 업무를 하고 싶다고 계속 의사를 전달했다.

해외 사업 부서로 전배 보내 달라고 상사에게 거듭 요청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끈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고 나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의지를 계속 끊임없이 전달했다.

당장 하던 일을 놓아두고 빠지면 상사와 부서원들이 힘들 것이기에 초반의 반대는 당연했다.

그렇다고 내가 하던 일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주어진 일은 정성껏 최선을 다해 처리를 하면서 주변에 나의 의사를 전달했다.

공인 영어 시험 성적도 받아 두었다.

그리고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이때 경험으로 인생은 도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도전을 선택하고 행동하니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 이후 변화의 시기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내가 변화하려고 노력하면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다.

또한 성장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변화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함을 배웠다.

전투나 스포츠에서 말하는 공격이 최상의 수비라는 말과 일맥상통할 것 같다.

'편안해져 익숙해져 버리는 상황을 경계'하며 살았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한 그런 나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주변의 누군가는 매우 불편했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당시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 진리는 아니지만, 나를 지탱해 주는 그것들을 놓고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주변에 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출부서에서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 새로운 부서 상사를 만나러 가는 길과 그의 앞에 앉아서 첫 대화를 나눈 장면을 기억한다.

그렇게 본사 수출부서의 새로운 상사를 만나서 면담을 하고 짐을 싸서 이동했다.

새로운 일이 금방 손에 익을 일도 아니고 한참 고전했다.

매일 아침 해외에서 오는 팩스를 정리해서 상사에게 보고하는 일, 업무 일지를 써서 결재를 받는 일, 생산 일정 체크, 물자 선적, 인보이스 신용장을 챙기고, CIF, FOB, DA 등등 무역 용어를 익히며, 수출 실무를 익혀갔다.

해외에서 바이어가 방한하면 63 빌딩, 경복궁, 이태원으로 모시고 다녔다.

수출 부서라지만 초기 몇 년은 국내에서 맡은 일을 했다.

처음부터 바이어 상담하고 계약하고 등등 폼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몇 해 실무를 익히고 '90년대 중반 어느 겨울, 첫 해외출장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허가를 받고 해외를 나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비행기 여행이라고 해봐야, 명절 때 고향을 다녀오느라 단거리 국내선을 서너 번 타본 것이 비행기 여행의 전부였고, 한반도를 떠나 물 건너 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일을 하러 가는 것이기에 마냥 들뜬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비행기를 타고 저 먼 나라로 나간다는 것이 매우 설레었다.


첫 출장을 가기 몇 달 전  

회사 선배 소개로 부산에 있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요즘 신세대 용어를 빌리면 롱디*를 막 시작할 때였다.

서울로 올라와 신입사원으로 일을 배우고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하나 둘 결혼하는 모습이 보였다.

막연히 결혼에 대한 현실적 어려움이 두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크게 결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은 자신의 사랑을 찾아, 짝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날 일과 후, 회사 선배가 만날 사람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나의 손을 이끌었다.

평소 소개를 시켜준다고 했기에 나도 내심 기다리기는 했었던 것 같다.

선배가 이끄는 대로 그의 차에 실려 한참 달려 서초동 카페에서 아내를 만났다.

지금도 그 첫 만남의 장면을 나는 기억하지만, 물어보니 아내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 아내가 입었던 무스탕, 그리고 헤어스타일, 식사하러 가는 길에 건널목을 건너며 나누었던 대화의 한 조각 그리고 그날 흐렸던 겨울 날씨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때를 떠올리면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어쩌면 그런 기억들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 이후 부산에 있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한 달에 한두 번씩 부산을 오갔다.

그리고 일과를 마치고 퇴근 후 늦은 저녁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다.

거의 매일 빠짐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외전화 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마약처럼 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 나눈 대화 내용을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 소소한 일상들에 관한 대화였을 것이다.

큰 주제의 대화나 거대한 담론이 아닌, 소소한 대화가 삶의 활력소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고 열흘 일정으로 첫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첫 출장지는 동유럽 발칸반도 국가들이었다.

당시 발칸반도는 구유고연방 해체로 연방이 붕괴되고, 몇 개의 독립 국가로 나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사회 인프라가 붕괴된 지역이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크로아티아, 슬로베이나, 세르비아를 순회하면서 파괴된 인프라 복구 프로젝트를 발굴하기 위한 비즈니스 미팅을 진행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비즈니스 미팅을 현장에서 진행하는 것 역시 처음이어서 많이 긴장을 했다.

일과를 마치고 동료 선배와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왔다.

일상을 벗어난 출장, 더더군다나 난생처음 가본 국가에서 심신의 상태가 정상일 수가 없었다.

투숙한 호텔에서 평소 하던 버릇대로 전화기를 들어 다이얼을 돌렸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있어서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데이터 또는 음성통화로 쉽게 연락할 수 있지만 당시는 유선전화가 유일한 통신수단이던 시절이었다.

30분가량 통화를 하고 끊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러 간 프런트 데스크에서 화들짝 놀랐다.

간밤에 큰 사고를 친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체크아웃 빌을 받아 들고 이상한 숫자가 있어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전화 요금이란다.

전화요금이 무려 천 달러 가까이 청구가 되었다.

당시는 유선 전화, 특히 국제통화 요금이 엄청난 시절이었다.

더더군다나 당시 발칸 국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통신 시설이 파괴되어 정상일 리 없었고, 요금이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지만 첫 출장의 긴장과 바쁜 일정으로 정신줄을 놓은 결과였다.

아차 했지만 이미 일은 저질렀고, 그 실수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나의 경험상 일과 사랑은 같이 가야 한다. 

서로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이후 오랫동안, 일이 있었기에 사랑을 가꾸어 나갈 수 있었고, 사랑을 통해서 일에 대한 의지와 삶의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둘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의 20대 청춘을 지탱해 주었던 소중한 것들. 사랑 찾기 그리고 일.

혼자였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을 통해 할 수 있었고, 그 사랑으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 사랑의 결실로 소중한 인연인 아들, 딸을 만나 또 다른 사랑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사랑에 아픔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지금은 알고 있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랑에 아픔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 아픔마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이고 삶을 살아내는 힘이 된다고 믿으며, 아직도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 아픔에 대해 배워 가고 있는 중이다.


일과 사랑이 전부였던, 저 멀리 아련한 20대의 '나'가 있다.

그리고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50 중반을 넘어 인생 후반부를 달려가는 또 다른 '나'가 있다.

그 둘은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도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다는 것을 느낀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아무것도 모르는 20대 청춘을 지나 30년이 흘러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특히 사랑과 그 사랑이 가져다준 아픔에 대해...


*'롱디'라는 단어를 방송의 짝 찾기 프로그랭에서 익히 듣고 '장거리 연예'라는 뜻은 알고 있었지만, 그 어원이 'Long Distance Relationship'를 뜻하는 것임을 지금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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