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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어

나와 타인의 자존감을 키우고 올려주는 말

by 숨고

그럴 수 있어


나이가 들었다는 표현보단 나이를 먹었다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나이가 듦에 따라 드는 것보단 먹어서 소화시키는 것들이 더 늘어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점점 세상이 변하고 나이라는 수치가 늘어감에 따라 자주 쓰게 되는 말이다.




나 자신이 싫어 마음이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던 기억. 사람은 살다 보면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는 어느 순간을 마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몸도 마음도 단단하게 근육을 붙여주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느 TV프로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운동에선 어설프게 넘어지는 것보단 완전히 고꾸라지듯 넘어져야 덜 다친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바닥에 제대로 부딪혀 충격을 제대로 흡수한다. 충격을 받아내면서 마음의 근육도 기르고, 또 근육을 붙이기 위해 근육을 찢고 그 자리에 더 큰 근육을 붙이듯. 그렇게 삶을 살아낸다. 그렇게 나를 스스로 잘 길러낸다.


그렇게 나를 잘 성장시키는 와중엔 가끔 이런 날이 있을 수 있다. 무엇 때문이든 남이 미워질 때 말이다. 내가 가진 게 그에게 있어서이든. 내 맘 같지 않아서이든. 내가 준 만큼 돌아오지 않아 서운한 날이든 어떤 이유에서건 타인이 미울 땐 이렇게 말해본다. '그 사람,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그럴 수 있어'라고 말이다. 조금 품이 넓어지는 마음이 들고, 상대도 편하고 내 마음도 편안한 말이다. 품을 넓히다 보면 담을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 마음도 옹졸함에서 멀어지고 조금 더 유연해지기 마련이다.


'유연함이 가장 강인함'이라는 말이있다. 우리는 수만 가지 사건과 상황의 기로에서 선택을 경험한다. 그렇게 실패도 성공도 주거니 받거니 반복한다. 선택을 번복하기도 하고 또다시 그 선택에 따라 무수한 실패도 반복한다. 자책으로 이어져 마음이 무너지기도 하고 우울의 늪에 빠지곤 한다. 그런 실패라는 파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어떻게 유연하게 나를 잔잔한 물가로 옮겨낼까. 그런 절망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힐 때, 스스로 일어설 힘이 필요하다. 누군가 그럴 때 건네주는 '그럴 수 있어'라는 말 한마디가 일어설 힘을 준다. 그런 게 '유연함'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한 파도를 맞닥뜨리고 넘어진 이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말이 있다면 이런 말이 아닐까 한다.


하소연도 마찬가지이다. 중립의 입장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내 딴에 바른말이라 싶은 쓴소리를 쉬이 하기보단. '걔가 오죽하면 그랬겠니 그럴 수 있어'라며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꼭 하소연의 당사자에게도 이 말을 붙여준다. '네가 그럴만하다. 그럴 수 있어.'라고 다독인다. 딱딱해 보이는 처사인 '중립'이라는 태도에서도 이 말 한마디로 따스함 한 수저를 상대 마음에 넣어본다.


양쪽 입장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이 있다. 내 편견과 판단으로 누구의 편을 들게 될 때를 조심해야 한다. 나의 판단과 편견은 그저 과거의 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정된 하나의 틀에 갇힌 답일 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변화될 무수한 것들은 내가 알 수 없다. 함부로 판단하여 뱉을 수 없다.





그렇게 중립을 취하되, 양쪽 모두 그럴 수 있다는 말은 이간질을 빚어내지도 않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성숙한 답을 원하는 상대에겐 현명한 대답이 될 것이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장 옳은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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