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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셀로 그린 심장

part 2

by 이열 Mar 15. 2025

“오빠, 내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녀가 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아야, 그런 말 하지 마. 넌 곧 나을 거야. 우리 약속했잖아. 셋이 함께 벚꽃 보러 가기로 했잖아...”

그녀의 마지막 숨결이 세상에 흩어지던 날, 나를 보듬었던 중력도 소멸했다.


나는 어느덧 우주의 미아가 되어 검은 공간을 부유할 뿐이었다.

사라진 별의 흔적만이 내 손에 남았다. 사진, 보이스 메시지, 그녀의 향기가 밴 옷들. 나는 그 모든 것을 붙잡고 애써 살아가려 했지만, 그녀 없는 시공간에서 내가 속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랑했던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세요.'

이터널스코프 사의 광고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채색의 날들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을 때였다. 고인이 남긴 유품과 의뢰인 인터뷰를 통해 그의 생전 모습을 AI로 재현해 주는 안경. 머릿속에선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발걸음이 나를 매장으로 끌었다.


잠깐 동안 샘플을 테스트 할 수 있었다.

안경을 통해 바라본 AI 모델은 깜짝 놀랄 정도로 실제 사람에 가까웠다. 오히려 안경을 벗었을 때, 내 앞의 실존이 투명하게 바뀐 것 같았다.


상담원에게 당일 제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가 실소를 참지 못하더니 친절하게 대꾸했다.

“한달은 걸리실 거예요. 저희는 완벽을 지향합니다. 한 번의 인터뷰와 두 번의 테스트가 있을 거구요. 모든 미팅은 한나절 동안 진행 됩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고인의 유품을 최대한 많이 가져오세요. 사진은 필수구요. 영상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나는 다시 하늘에 나의 별을 띄우기 위해 집착했다.

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된 인터뷰, 그리고 다섯 번의 테스트가 이어졌다. 추가 요금에 대한 안내를 받았지만, 돈이 얼마나 들든 상관 없었다. 광기에 가까운 그 집착의 끝에, 드디어 지아를 세상에 불러올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 그녀의 목소리, 심지어 그녀만의 독특한 몸짓까지 완벽히 재현해냈다. 별이 다시 빛났다. 나는 환희의 그림자 아래 그것이 결코 지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묻었다.




<지아>를 처음 활성화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현준 오빠? 정말 오랜만이야. 나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어?” 얼어붙은 내 얼굴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지아야...” 나는 안경 너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속삭였다. <지아>가 웃었다. 예전처럼 밝고 사랑스럽게. “왜 울어, 바보 같이. 오랜만에 내 얼굴 보니까 그렇게 좋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냥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동시에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실제 그녀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녀와는 일치했다. 그녀의 미소를 눈 앞에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다시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아>와 나는 마치 예전처럼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반응했다. 내가 물으면 금세 대답했고, 내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나를 숨막히게 만들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지아>에게 물었다. “지아야, 너도 외로울 때가 있니?”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나? 오빠가 여기 있잖아. 그런데 왜 내가 외로워야 해?”

그 대답이 나를 하릴없이 무너뜨렸다. 그녀는 외로울 수 없었다. 단지 내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으니까. 그 사실이 너무나도 뼈아프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아>를 놓아줄 수 없었다. 다시 그녀를 잃는다면 나도 함께 사라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지아와 함께하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의 목소리가 날 깨웠고, 밤에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심지어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지아는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내가 정말 지아처럼 느껴져?”

나는 갑작스런 그 질문에 크게 당황했다. 버그인가? <지아>는 지아의 정체성을 프로그래밍한 존재였으므로, 방금 뱉은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가 가진 지아에 대한 모든 기억과 사랑의 집합체였다. 나는 매뉴얼을 찾는 대신,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너는 내게 지아야.”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가 진짜 지아가 아니라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아>와 함께할 수 있다는 현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의 별은 졌지만, 나는 이제 그 별의 흔적과 함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아야,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줄 거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오빠. 내가 있는 한, 오빠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나는 화면 속 그녀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나를 구원했고, 나는 그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사랑의 형태였다. 비록 그것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겐 이만하면 충분했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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