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씌워주시다니요.

무해한 그 웃음에 반하겄어라.

by 홍고롱


'미지의 서울' 정주행을 시작해, 열 편 가까운 내용을 한 번에 섭렵하고 나니 문득 불안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막막함.


뭐라도 안 하면 불안해지는 내가 싫어서, 퇴사 이후엔 더 계획적인 인간이 되려 애썼다.

방콕과 입원으로 한 달을 훌쩍 날려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이었다.


그 사이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내가 뭘 싫어하는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쌓였다.


그런데도, 정작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가끔 이렇게 막막한 순간이 오면, 나조차도 나를 놓고 싶어진다.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나가자. 아무 생각 없이 달릴 때야."


그대로 뛰쳐나갔다. 비가 스믈스믈 내리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다 부숴버릴 기세로 공원을 향해 달려가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


뛰는 데는 음악 선곡이 중요하니까.

플레이리스트를 고르며 고개를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빗방울이 몸에 닿지 않았다. 뭐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색 우산 하나가 나를 덮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모르는 남성분과 눈이 마주쳤고,

나를 향해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다.


이어폰 때문에 말은 안 들렸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더라.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선 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거다.


그는 하늘색 스트라이프 반팔티에 하늘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산과 아주 잘 어울리는, 순도 100%의 젊은이.


갑자기 신호가 바뀌었고, 내 얼굴엔 당황과 웃음이 교차했다. 이 순수한 사람 보게.


0.5초쯤 감사 인사를 건네고,

나는 뻘쭘하게 웃으며 공원을 향해 다시 달렸다.


그런데 그 웃음이, 집에 돌아오는 순간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강동원 저리 가라였다.


덕분에 마음이 느슨해졌다. 나는 역시 따뜻한 것에 취약하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억지가 아닌, 사람 고유의 인간다움에 쉽게 녹는다.




샤워를 마치고 아보카도와 견과류를 씹던 중,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 둘을 키우고 형부 뒷바라지에 정신없는 그녀는,

오랜만에 연락이 올 때마다 나에게 무한 긍정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넌 잘하고 있어. 항상 응원해."


그녀는 2014년, 나의 하나뿐인 분신이었다. 성향도 닮았고,

우린 인생의 한 치 앞을 모른 채, 맨땅에 헤딩하며 살았다.


'미지의 서울'의 모토처럼,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한때는 우리가 도 닦으러 템플스테이를 가겠다고 했더니,

내 당시 남자친구는 "절 오빠 꼬시러 가냐"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했지만, 그런 그의 현학스러움이 좋았던 것도 같다.)


그녀는 2년 후 형부에게 낚여(?) 시집을 가고,

다음 해 아이를 가지며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우리는 누구와 함께 있든,

혼자 있든 스스로 안정을 찾아내던 긍정왕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인생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하는데, 언니는 그런 나를 부러워하며 말했다.

"지금을 즐겨. 뭐든 할 수 있는 네가 참 부럽다."


누구나 말 못 할 힘듦은 하나씩 가지고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또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맞는 말이잖아. 뭐든 할 수 있잖아. 용기가 조금 부족해서 머무르고 있을 뿐.

하고 싶은 걸 찾자. 아직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기회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존재의 8할은 해낸 거다.

나머지 2할은, 하고 싶은 걸 하며 채워가면 되지.


내가 능력이 뛰어나서도, 돈이 많아서도 아니다.

누구와 비교하지 말고, 내 식대로, 내 속도로 나아가면 된다.


이걸 나에게 매번 각인시켜야 하나 싶지만,

매번 확인받고 싶은 여자친구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남자친구가 없으니, 내 스스로에게 확인해주자.


아, 우산 요정님. 덕분에 오늘 삶이 또 흐뭇해졌어요. 덕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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