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달렸을 뿐인데,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갑자기 날이 추워져 황급히 두꺼운 패딩을 꺼냈던 날, 아이 신발을 사러 아웃렛을 갔다가 금액을 얼마 채우면 더 할인을 해준다길래 일상화로 신을 생각으로 예뻐 보였던 러닝화를 하나 같이 결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러닝화 보단 패션 일상화에 가까운 러닝화였지만 제대로 달려본 적 없던 아저씨가 뭘 알겠는가. 그냥 예쁘고 적당한 가격이니 산 거지.
회사에서 나이가 많고, 체지방률이 높은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매달 공지 메일이 왔지만 애써 모른 척했었는데, 마침 신발도 하나 샀으니 못 이기는 척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회사 헬스장 문을 열었다.
그날 처음 GX로 필라테스를 배워봤고, 처음으로 내가 남들보다 몸이 유연하다는 걸 느꼈었다. 뿌듯하게 첫 운동을 끝내고, 몸에서 땀도 나고 개운한 느낌이 들어서 웬일인지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러닝머신은 지루한 몸풀기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처음은 어찌할 줄 몰라 3km 정도를 9km/h 정도로 뛰었던 것 같고, 그 이후에도 필라테스 수업이 있는 날이면 끝나고 러닝 머신을 뛰었다. 그러다가 5km를 쉬지 않고 뛰게 되고, 속도를 10km/h로 놓고 뛰게 되고, 점점 한 가지씩 성공하는 미션이 생겼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미션이기에 매일의 달리기는 항상 뭔가 성공이 있었다. 멈추지 않고 뛰기, 12km/h로 1km 뛰기, 13km/h로 10분 뛰기 등등 별의별 미션을 세우고 매번 성취감에 젖었다. 현실에서는 그런 성취감이 없었기에 더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여름부터는 매달 100km 즈음을 꾸준히 달리게 되었고, 대부분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으로 달리다가 우연히 여행지에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신청한 8월 호주 5km 마라톤 덕분에 점점 밖에서 달리는 거리도 늘려 갔다. 그걸 시작으로 9월 10km 마라톤도, 얼마 전 11월 하프마라톤도 달려봤다. 그렇게 내 삶에 러닝이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살을 뺄 생각은 없었다. 물론 결혼 전에 비해서 몸무게가 많이 늘긴 했다. 결혼 전에 60kg 후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운동 시작하기 전에 몸무게가 80km 정도였으니 11~12kg 정도는 더 쪘고, 옷도 자연스럽게 사이즈가 늘었다. 얼마 전에는 영영 입지 못할 옷들을 헛옷 수거함에 씁쓸하게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앞에 말한 것처럼 살을 빼야겠단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살이 쪘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물론 건강 검진에서 비만이라고 나오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런데 달리기를 시작하니 뭔갈 먹고 달리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점심을 먹은 이후 아무런 간식을 먹지 않고 다섯 시에 필라테스를 가고 필라테스 후 바로 러닝머신을 달렸다. 그리고 난 후 7시 정도에 포케를 먹었다. 밥을 먹을까도 했는데 회사 식당은 이미 운영을 종료한 시간이었고, 먹을 수 있는 건 포케나 단백질 파우더 정도였다.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서 우걱우걱 먹긴 했지만 너무 힘들게 운동을 했더니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래서 남은 일을 마치고 집에 와도 야식 생각이 안 났다. 그랬더니 몸무게가 급격히 빠졌다.
작년 11월에 운동 시작 한 달 후 3kg가 빠졌고, 일 년이 지나고 5kg가 더 빠졌고, 최근에 쟀을 땐 딱 70kg가 나왔다. 체지방률도 24%에서 16.8%로, 그리고 11월에 인바디 쟀을 땐 15%가 나왔다. 운동도 운동이지만 안 먹어야 빠지는 것 같다.
숫자만이 아니고 체형도 많이 달라졌다. 달리기와 병행해 필라테스를 꾸준히 하다 보니 복근도 잡히고 허리가 확실히 잘록해졌다. 무게가 줄어들며 처음에 뛸 때 아프던 무릎도 자연스럽게 멀쩡해졌다. 덩달아 습관적으로 먹던 술도 줄었다.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서 혼술 할 기운도 없었으니까. 기분 좋은 선순환이다.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내 몸과 더 친해진 점이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꼭 어딘가 아프게 마련이다. 처음엔 오른쪽 무릎이 아프더니, 그게 나으니 왼쪽 고관절이 아프고, 그게 나으니 왼쪽 발목이 아팠다. 부상 때마다 연구가 시작됐다. 왜 아프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때 근골격 질환을 담당해 주시는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오른쪽 무릎이 아플 땐, 여러 시도 끝에 대퇴장막근, 종아리근 스트레칭이 가장 효과적인 걸 깨달았고,
https://brunch.co.kr/@0bc5b1bc6928471/96
고관절이 아플 때는 대퇴직근, 봉공근 스트레칭,
https://blog.naver.com/haffywind/224036464610
발목 때는 밴드로 하는 발목 강화 훈련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해법이다. 몸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 방법을 써보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다. 내가 내 몸에 이렇게 귀 기울인 게 언젠가 싶게 지독하게 스트레칭과 준비 운동을 했던 것 같다. 왜냐면, 뛰고 싶었으니까. 아픈데 억지로 뛰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부상은 스트레칭도 스트레칭이지만 꾸준히 운동하다 보면 나아지는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조심하고 잘 풀어주고 무리가 되지 않게 운동을 하다 보면 몸은 어느덧 회복하고 부하를 줬던 주변 근육이 강해지면서 아프지 않게 됐다. 모르는 척 무리해서 했다면 아마 더 큰 부상이 되고 그만 달려야 할 수도 있었겠지.
요 근래 회사일이 참 많이 힘들었다. 일이 힘들다기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었고, 내 위치가 힘들었고, 내 미래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어떤 일을 지금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마음에 부담만 가득 쌓여만 갔다. 누군가 딱히 무얼 하라고 한 게 없으니 내가 날 좀 먹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때 날 구해준 게 달리기였다. 처음엔 음악에 집중하고, 오디오북에 집중하고 달리기가 아닌 다른 것에 집중했었는데, 달리다 보니 음악은 그냥 배경음이고 자연스레 내 달리기에 집중하게 된다. 내 발바닥이 어디부터 닿고 있고, 발목에 힘은 얼마나 들어가고, 보폭은 어느 정도이고, 무릎에 통증, 근육의 통증, 고관절의 통증, 허리가 곧곧한지, 팔은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흔드는지, 가슴은 앞으로 내밀고 기울어지지 않는지, 호흡은 안정적으로 잘하는지, 턱, 그리고 시선은 어떤지 등등 달리는 내내 달리기만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일상은 그냥 잊는다. 달리는 것 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그 시간이 좋다. 온전히 나만 생각하는 시간.
회사 고민을 해봤자 사실 달라지는 건 없다. 일은 일과시간에 하는 거고, 일을 안 할 땐 쉬어야 한다.
나에게 쉼은 회사와 연결된 선을 끊는 것 같다. 그렇게 난 내 마음과 더 친해졌다.
올 시즌도 이렇게 끝났다. 달리기는 계속 하지만 대회는 끝났다. 그래서 내년 목표를 세워보기로 했다. 42.195km. 혹자는 그런 말을 한다. 풀코스는 정말 다른 영역이라고. 자기도 하프까지는 뛰어봤는데, 풀코스는 30km 넘어가면 몸이 아예 움직이질 않는다고.
나도 아직 그 거리까지 해보진 못했지만, 걱정되기보단 궁금하다. 하프까지는 꾸준히 준비한 덕분에 퍼져본 적이 없었다. 왠지 계속 더 연습해서 체력을 더 만들면, 풀코스도 하프처럼 웃으며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직 난 젊다. 잊고 있었던 내게 러닝이 알려줬다. 난 아직 달릴 수 있다고.
약 30주간의 연재가 끝났다.
나에겐 재미있었지만 과연 읽는 분들에게도 재미가 있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온전히 내가 좋아서 시작한 연재였기에 더 그럴 것 같다.
내가 특별한 달리기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기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기 주류인 2~30대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노력을 하고 비슷한 도전과 실패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달리기에 대한 다음 연재를 시작할지 말지는 한주 동안 고민해 봐야겠지만, 달리기는 계속해야지. 달리기를 계속한다면 언젠가 또 글을 쓸 것이기에 시즌1의 에필로그를 적어본다.
글과 달리기 모두 나에겐 어울리지 않던 해보지 않았던 일이지만 안 해봤기에 큰 기쁨을 줘서 감사했고 지나가면서라도 읽어주셨을 독자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