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몰랐다. 그저 음식 준비로 바쁜 날들이라 여겼고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질 생각에 마냥 신났다. 그땐 엄마의 바쁨이 얼마나 힘겨운 땀방울이었는지, 아빠의 지게가 얼마나 무거운 삶의 무게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해맑게 엄마의 뒤를 쫓고, 아빠의 옆을 뛰어다녔을 뿐이었다.
가을만 되면 엄마는 한숨이 시작되었다. 붉은 고무대야에 곡식을 넣고, 5일장이 열리는 읍내 시내로 한 시간을 걸어가던 그 뒷모습. 나는 시장구경이 좋아서 따라나섰을 뿐이었다. 시장 난전에 할머니들 틈에서 보자기를 펼친 후 곡식(검은콩, 옥수수등)을 해 지도록 팔고 그 돈으로 다시 생선이며 과일을 사 오시던 엄마 그 돈 해봐야 얼마라고 ㅠ 그렇게 다시 머리 위에 또아리(검색해 봄)를 얹고 무거운 고무대야를 이고 돌아올 때면 이미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음 날은 온종일 허름한 부엌에서 장작불과 곤로(이건 기억남)에 의지해 음식을 하셨다. 명절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음식을 하시는지 그때의 음식은 나에게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최고의 진수성찬이었다. 6~7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나는 그저 먹을 게 많다는 이유로 신나 했을 뿐이다.
다음날 새벽 아버지는 음식을 지게에 싣고 무거워진 지게를 다시 메고 산길을 올랐다. 동네 어르신들이 '천하장사'라고 부르셨던 아빠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도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난 놀러 간다는 생각에 옆에서 헐떡이며 따라 올라갔다. 한두 시간 넘게 걸었을까. 내리막이 시작되고 또 30분 이상 걷자니 까만 기와집이 나타났다, 갓을 쓴 어른들이 모인 그곳에서 제사가 시작됐다. 어린 내 눈엔 마치 영화 속 장면 같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가난이 만든 의식'이었다.
그 제사가 '우리 집의 것이 아닌 '집안 문중 제사'라는 걸 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분들이 빌려준 땅의 대가로, 엄마는 매년 그 제사를 대신 준비하고 계셨던 거다. 엄마는 그렇게 매년, 자신의 젊음을 땔감처럼 태워 제사상을 차리셨다. 그 제사상 위엔 조상도, 제물도 아닌 엄마의 고생하던 손마디와 한숨이 있었다.
엄마가 되어보니 그 모든 장면이 이해된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던 마음이
"그땐 우리 5남매가 있어서 그렇게라도 살아내야 했구나."로 바뀌었다. 하지만 엄마는 화창한 봄날, 꽃다운 나이에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갑자기 떠나셨다. 난 18살이었다. 산길을 오르던 그날, 아버지의 지게 위에서 살짝 흔들리던 음식들, 그 안에 담긴 건 단순한 제사 음식이 아니었다. 그건, 한 여자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태운 사랑의 무게였다.
시댁에선 일년에 명절 포함 7번 제사를 지냈다. 시댁 제사만 다가오면 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얼굴도 모르는 시댁 조상 제사를 왜 내가 지내야 하냐며 유일하게 남편과 갈등을 일으켰다. 고생하며 음식을 만들던 그때의 엄마가 생각나서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시부모님과 상의 후 3년 전부터는 제사를 다 없앴다. 살 것 같다...
엄마! 아빠! 이제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고생, 절대 헛되지 않았어요. 당신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 5남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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