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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명절뉴스] 추석에 묻다

우리는 여전히 친척인가

by 이안류

올 추석, 나는 처음으로 예전처럼 무겁고 큰 선물세트를 들고 어머니 댁으로 향하지 않고 대신, 미리 택배로 추석 선물을 보냈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여전히 일손을 놓지 않아 바쁘기도 했거니와 택배에 익숙하신 분이 아니어서, 나는 명절마다 선물을 직접 들고 부모님 댁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올해부터 어머니가 일을 접고 집에 계시게 되어 처음으로 택배 선물세트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뭔가 어머니께 보내는 명절 선물은 직접 보고 고르고 가져다 드려야 된다는 나의 습관도 시대의 흐름과 나이 듦에 백기를 들고 있었다.



어릴 때는 명절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차비를 하고는 일원동에 사시는 큰 외삼촌댁에 선물세트를 잔뜩 들고 찾아갔었다. 형제가 많았던 어머니 덕분에 명절 당일 날은 오전과 오후로 이집 저집을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식사를 하는 순례가 매년 반복되었었다. 차가 막혀서 당일날은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했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손에 온갖 선물세트를 들고 가족단위로 혹은 혼자서 분주히 목적지를 향해 걸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어머니 댁을 방문하러 가는데 유난히 대중교통에서 만난 사람들의 손이 가벼워 보였다. 명절날이라기보다 그저 휴일의 모습 같았다. 나 또한 택배로 미리 선물세트를 보낸 상황이라 이상할 것도 없지만, 뭔가 명절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나이듦의 신호였을까. 그래서 변화한 명절 모습과 인간관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개인주의의 확산

예전에는 가족, 친척, 마을과 같이 집단의 규범과 전통이 개인의 선택보다 우선했다. 명절에 부모님과 웃어른들을 찾아뵙는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집단의 규범이나 전통보다는 개인의 편의와 휴식, 삶의 균형이 더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명절조차 가족이 모이고 친척들의 방문을 통해 혈연관계를 돈독히 하기보다는 개인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으로 점점 재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 집단 활동은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은 해외여행이나 개인 용무, 휴식으로 보내며 재충전하고 힐링하는 기간으로 재정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2. 관계 거리두기

심리학적으로 피곤하거나 갈등이 많은 관계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비용을 요구한다. 뉴스에서 명절을 앞두고 나오는 기사들은 며느리의 명절 준비로 인한 고된 노동과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 간의 다툼이 주를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분란은 생길 수밖에 없으며, 친척이라는 위계구조 속에는 늘 피해 보는 대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어릴 때 큰 외삼촌댁을 방문하면 외숙모들은 끝도 없는 음식준비와 설거지로 제대로 앉아서 대화도 나눌 수 없었었다. 삼시세끼 앉아서 손님들을 맞으며 손 까딱하지 않는 삼촌들을 보면서 명절은 남자어른들을 위한 날이라는 생각을 했었었다. 이러한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명절 풍습의 면모는 친척이 모이면 피곤하고 힘들다는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 점차 확장된 가족보다 핵가족과 자신이 선택한 관계에 더 에너지를 쏟게 만들었다. 즉, 피로감만 남기고 의미가 없는 친척 관계는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3. 관계의 기능적 전환

과거 명절은 오랜만에 친척을 만나고 소식을 나누는 관계 유지의 장치였다.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쉽게 소식을 전할 수 없었던 시대에 명절은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여서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는 만남의 장이 되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언제든 전화나 메신저로 안부를 물을 수 있기 때문에 만남의 장이 굳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예전에 비해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이미 포화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점점 지속적으로 만나며 실질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는 관계만을 유지하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차단하려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명절 때만 만나는 가깝지 않은 친척관계처럼 의미 없는 만남보다는 기능 있는 만남이 선택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게 되었다.



4. 사회적 연결 방식의 변화

명절날 손에 들고 가던 선물세트는 이제 송장 번호로 대체되었다. 비대면과 간소화는 우리 사회 전반의 흐름이다. 이제 중요한 건 ‘가져가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담긴 전달’이라는 점에서, 선물의 상징적 의미조차 효율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무거운 선물 세트를 들고 가는 노동보다는 상대를 위해 어떤 선물을 선택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참신하고 까다롭게 선별된 택배가 왕복 운동의 땀방울보다 정성과 진정성을 표현해 주는 사회적 연결 방식이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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