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우리만 아는 데이트 신호

도환의 루틴(유블리안)

by 유블리안





​어느덧 계절의 색깔이 조금씩 짙어지고,

거리의 가로수들이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우리의 만남에도 ‘루틴’이라는 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 은하 씨를 만났을 때 느꼈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날 선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대신 그 빈자리는 기분 좋은 안정감과 따스한 익숙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내는 ‘굿모닝’ 카톡, 점심시간의 짧은 통화,

그리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는 이 시간들.

이 모든 것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주말 오후 2시.


우리의 약속 장소인 단골 카페에 도착한 나는 그녀를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수십 번 고민하고 식은땀을 흘렸겠지만,

이제는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얼음 적게 넣은 자몽 허니

블랙티 한 잔 주세요.”


​주문은 거침없었다.


진동벨이 울리고 음료 두 잔을 받아 들고 자리로 가니,

때마침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은하 씨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내가 있는 창가 자리로 걸어와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 도환 씨, 벌써 시켰어요? 저 뭐 마실지 아직 말 안 했는데?”


​그녀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를

번갈아 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의기양양했다.


​“은하 씨, 요즘 오후에는 카페인 때문에 커피 대신 상큼한 거 찾잖아요.

그리고 얼음 많이 넣으면 나중에 밍밍해져서 맛없다고 싫어하고요.

맞죠?”


​나의 대답에 은하 씨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오후의 햇살보다 더 따사로웠다.


​“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나도 가끔 까먹는데.

도환 씨 진짜... 이러니 내가 안 반해?”


​은하 씨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속으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만약에 틀렸으면 어쩔 뻔했대. 이불킥 감인데.’


​은하 씨가 내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었는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한 눈치였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얼굴 가까이 턱을 괴었다.


​“도환 씨,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뭐 찔리는 게 있어요? 아니면...

우리 그날, 빗속에서 했던 첫 뽀뽀가 생각난 건가? 호호호.”


“아, 앗! 그게 아니고...”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장난인데 얼굴에 귀까지 빨개지는 거 보니 무슨 야한 생각을 했을까?

도환 씨 은근히 늑대라니까.”


​우리는 민망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채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녀는 빨대를 꽂아 자몽 허니 블랙티를 한 모금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것 아닌 일상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취향이 내 몸에, 내 기억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뿌듯했다.


​“그래서 김 부장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아니, 글쎄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굽다가 ‘고기 굽는 게 지겹지? 그럼 고기 말고 조기(저기)를 봐’ 이러는 거예요. 진짜 분위기 싸해져서 제가 억지로 웃느라 턱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다.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창밖으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카페 안에도 은은한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배고프다. 도환 씨, 저녁 뭐 먹을까요?”


​은하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


​“아니면... 우리 ‘그거’ 먹으러 갈까?”


​순간, 내 동작이 멈췄다.



구체적인 메뉴 이름도, 식당 이름도 없었다.

그저 ‘그거’라는 불분명한 대명사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가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가서 소주 한 잔 기울이던

그 단골 파전집. 우리가 같이 가던 따로국밥집.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서로가

무엇을 원할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텔레파시 같은 교감.


​“‘그거’ 좋죠. 딱 생각나던 참이었는데. 가요, 우리.”


​내 얼굴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퍼져 나갔다.


“얼른 가자, 배고파서 현기증 난단 말이야”

라며 앞장서서 걸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서로의 사소한 취향을 기억하고 ‘그거’라는 단어 하나로 통할 수 있는

이 소소한 루틴이야 말로 소확행 아닐까.


​앞서 걷는 그녀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오며 더 단단히 잡아주었다.

이제는 따귀 맞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워졌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데우는 것 같았다.

나의 얼굴도 다시금 화끈거렸다.


​‘심장아, 제발 좀 체통을 지키거라. 나대지 말고.'


​두근. 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마치 행복을 알리는 행진곡처럼 느껴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