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환의 루틴(유블리안)
어느덧 계절의 색깔이 조금씩 짙어지고,
거리의 가로수들이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우리의 만남에도 ‘루틴’이라는 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 은하 씨를 만났을 때 느꼈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날 선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대신 그 빈자리는 기분 좋은 안정감과 따스한 익숙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내는 ‘굿모닝’ 카톡, 점심시간의 짧은 통화,
그리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는 이 시간들.
이 모든 것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주말 오후 2시.
우리의 약속 장소인 단골 카페에 도착한 나는 그녀를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수십 번 고민하고 식은땀을 흘렸겠지만,
이제는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얼음 적게 넣은 자몽 허니
블랙티 한 잔 주세요.”
주문은 거침없었다.
진동벨이 울리고 음료 두 잔을 받아 들고 자리로 가니,
때마침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은하 씨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내가 있는 창가 자리로 걸어와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 도환 씨, 벌써 시켰어요? 저 뭐 마실지 아직 말 안 했는데?”
그녀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를
번갈아 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의기양양했다.
“은하 씨, 요즘 오후에는 카페인 때문에 커피 대신 상큼한 거 찾잖아요.
그리고 얼음 많이 넣으면 나중에 밍밍해져서 맛없다고 싫어하고요.
맞죠?”
나의 대답에 은하 씨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오후의 햇살보다 더 따사로웠다.
“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나도 가끔 까먹는데.
도환 씨 진짜... 이러니 내가 안 반해?”
은하 씨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속으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만약에 틀렸으면 어쩔 뻔했대. 이불킥 감인데.’
은하 씨가 내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었는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한 눈치였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얼굴 가까이 턱을 괴었다.
“도환 씨,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뭐 찔리는 게 있어요? 아니면...
우리 그날, 빗속에서 했던 첫 뽀뽀가 생각난 건가? 호호호.”
“아, 앗! 그게 아니고...”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장난인데 얼굴에 귀까지 빨개지는 거 보니 무슨 야한 생각을 했을까?
도환 씨 은근히 늑대라니까.”
우리는 민망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채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녀는 빨대를 꽂아 자몽 허니 블랙티를 한 모금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것 아닌 일상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취향이 내 몸에, 내 기억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뿌듯했다.
“그래서 김 부장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아니, 글쎄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굽다가 ‘고기 굽는 게 지겹지? 그럼 고기 말고 조기(저기)를 봐’ 이러는 거예요. 진짜 분위기 싸해져서 제가 억지로 웃느라 턱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다.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창밖으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카페 안에도 은은한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배고프다. 도환 씨, 저녁 뭐 먹을까요?”
은하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
“아니면... 우리 ‘그거’ 먹으러 갈까?”
순간, 내 동작이 멈췄다.
구체적인 메뉴 이름도, 식당 이름도 없었다.
그저 ‘그거’라는 불분명한 대명사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가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가서 소주 한 잔 기울이던
그 단골 파전집. 우리가 같이 가던 따로국밥집.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서로가
무엇을 원할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텔레파시 같은 교감.
“‘그거’ 좋죠. 딱 생각나던 참이었는데. 가요, 우리.”
내 얼굴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퍼져 나갔다.
“얼른 가자, 배고파서 현기증 난단 말이야”
라며 앞장서서 걸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서로의 사소한 취향을 기억하고 ‘그거’라는 단어 하나로 통할 수 있는
이 소소한 루틴이야 말로 소확행 아닐까.
앞서 걷는 그녀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오며 더 단단히 잡아주었다.
이제는 따귀 맞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워졌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데우는 것 같았다.
나의 얼굴도 다시금 화끈거렸다.
‘심장아, 제발 좀 체통을 지키거라. 나대지 말고.'
두근. 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마치 행복을 알리는 행진곡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