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힘을 다해 달렸건만
학원에 가기 2시간 전, 이어폰을 꽂은 채 단어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미 모두 외운 단어였기에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었지만 그것만이 내가 바깥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바깥세상. 그곳에서는 엄마와 아빠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니 아빠는 무언가를 계단 쪽으로 세차게 집어던지고 있었고 소리에 놀란 이웃들이 나와 아빠를 말리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들리던 엄마의 절규는 그 사이에 점차 잦아들었고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잘 도망갔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떨리는 손을 겨우 붙잡으며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아빠는 지금 아저씨들이 말리고 있어. 아직 여기 있으니까 엄마는 얼른 도망가.'
그리곤 혹시나 아빠가 문자를 볼까 싶어 엄마에게 보낸 문자를 황급히 삭제했다.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조치를 취한 뒤, 방에 홀로 남아 바깥이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리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뛰었지만 태연한 척 단어장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감에 휩싸여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랐다. 아빠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술 냄새는 짙어졌고 숨 막히는 적막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탁.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아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아빠가 빚을 내서라도... 공부 다 시켜줄게... 걱정하지 마!"
다 새어나가는 발음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치 화내듯 소리치며 말했다. 문장만 보면 따뜻한 아빠의 응원 같았지만 아빠의 말은 정반대로 들렸다. 아빠가 평소에 늘 하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돈이 어디 있어?"
아빠는 늘 이 말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정말 가난한 줄 알았다. 그래서 배우고 싶은 게 많았지만 우선순위를 매겨 꼭 배우고 싶은 걸로 딱 한 가지만 골라 학원에 다녔다. 엄마도 아빠도 그러라고 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이 가난한 것 같으니 스스로 그렇게 했다.
'이제 다른 걸 배워야 하니까... 피아노는 여기까지만 배우자.'
응원해 주고 믿어주는 어른이 없으니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더 나아갈 생각은 하지 못했고 늘 혼자 눈치를 보며 한계를 정했다. 그래서 돈이 들지 않는 학교 공부에 더 몰두했다. 남들보다 시간을 더 들여 끝없이 복습했고 치열하게 노력한 대가로 입시에서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원했던 대학에 모두 합격했고 어떤 학교에 등록할지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막상 결승선에 도착하니 그 선을 끊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나의 성취, 나의 행복보다 돈 걱정이 앞서 바로 눈앞에 그토록 바라던 꿈이 기다리고 있어도 선뜻 선택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A대학을 강렬하게 원했지만 등록금과 기숙사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B대학을 선택했다. A대학 입학처에서도 '어떤 학교에 합격했길래 우리 학교에 등록을 안 하세요?'라고 되물었을 정도로 나의 선택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 아빠만은 나에게 좋은 학교에 입학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결승선을 끊는 데는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강한 자존감이었다.
설령 우리 집이 정말로 가난했다 할지라도
건강한 자존감과 용기가 있었다면
장학금을 알아보든,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그 대학에 가도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 단정 지었다.
또 돈을 들였다면 그만큼의 성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학비 걱정도 없고 취업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안정적인 B대학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여전히 높지만은 않은 나의 자존감 때문에
우리 아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축되어 살아가진 않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가족 치료의 대가 버지니아 사티어가 남긴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나의 아이에게만은 건강한 자존감을 물려주리라 다짐해 본다.
"낮은 자존감은 학습된 것일 뿐. 배운 것은 잊을 수 있으며 새로운 배움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기억과 웃으며 작별할 시간이다.
그래야 그 빈 자리를 자존감으로 하나씩 채워나갈 수 있을 테니.
나를 위해, 우리 아이를 위해.
엄마가 된 나는 하지 못할 일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