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진짜 어른을 만났다
지금의 남편은 나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부터 우리집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술기운에 용기가 나기도 했고, 우직한 성격의 그라면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나 잘 해내왔네."
그의 성격답게 담백한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나를 버티게 했다.
그는 이미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도 그의 가족에 대해 먼저 알아두고 싶었다.
그는 20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이후 홀로 삼형제를 키우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일터를 오가며 살림을 꾸리셨고, 삼형제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 결혼할 때까지도 일을 놓지 않으셨다고 했다.
남들이 힘들다고 손사래 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런 일마저 없을 때면 리어카를 끌고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다니며 폐지를 모으셨다.
젊은 사람도 버거운 일을, 작고 여린 체구의 어머니는 묵묵히 해내셨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끝까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그런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꾸만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비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모난 마음이 꿈틀거렸다.
'우리 엄마는 왜...'
'우리 아빠는 왜...'
쌓여 있던 미움과 불만이 결국 남편을 부모님께 처음 소개하던 자리에서 터지고 말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 안해서 보내도 되지?"
그날, 엄마가 그를 보며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시어머니는 우리의 신혼집과 혼수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지만, 생색 한번 내지 않으셨다.
우리 집 사정을 미리 들으셔서 알고 계셨을 텐데도, 첫 만남 자리에서는 가족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셨다.
그저 "둘이 행복하게 잘 살면된다." 하시며 따뜻하게 웃어주셨다.
물론 애초에 결혼 준비는 오롯이 둘만의 힘으로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힘들게 일하시며 도와주신 시어머니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함만 남았다.
그런데 엄마는 결혼 준비로 바쁜 나에게 오히려 돈을 바라셨고, 첫 인사자리에서는 사돈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셨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아빠.
그 순간, 처음으로 부모님이 내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꼭 '폭싹 속았수다'의 상견례 장면 같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새 옷을 곱게 차려 입었지만,
궃은 일을 하시느라 거칠어진 손으로 낡은 외투를 걸치고 오신 시어머니의 모습이 오히려 더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늘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나의 가족이 될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큰 소리라도 내면, 우리 집의 밑바닥을 다 보여주는 것 같아 자리가 끝난 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신혼집도, 혼수도 어머니께서 이미 많이 도와주셨는데 나도 혼수 몇가지는 당연히 할거야. 엄마한테 해달라고 안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쓰지마."
시댁에서는 친정이 마음 쓰일까 봐 이런 얘기는 하지 말자 하셨지만,
나는 그래도 엄마, 아빠가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했다.
정말로 자식을 존중하는 부모는 어떤 말을 하는지,
정말로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는 어떤 모습인지,
정말로 자식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은 부모는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정신 없던 우리의 결혼식 날.
남들은 부모님을 보면 눈물이 날까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다는데,
이상하게 나는 계속 웃음이 났다.
후련하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한 마음에
신부 대기실에서부터 식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한 번,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눈이 한 방울 흘러나왔다.
다름 아닌, 시어머니께 인사를 드릴 때였다.
평소 수수한 모습과 달리
고운 한복 차림으로 앉아 계시던 시어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형제를 홀로 키워내며 견디셨을
외로움과 두려움, 고단함이
그리고 바로 지금의 행복이
한꺼번에 전해지는 듯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눈맞춤 속에서 나는 느꼈다.
이제 나에게도 든든한 어른이 생겼다는 것을.
그때의 그 한 방울의 눈물은
감동의 눈물이자,
안도의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