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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우주를 기다리며

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진 이유

by 우주숲


결혼 후 2년 동안은 꿈꿔왔던 로망들을 하나씩 실현하느라 주말이면 늘 바빴다. 캠핑도 다니고, 처음으로 해외 여행도 가봤다. 남편에게 운전을 배운 뒤로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함께 드라이브를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되었다. 가끔은 아주 늦은 밤까지도 낭만 가득한 야경을 즐기러 무작정 떠나보기도 했다.


무언가에 구속받지 않는 이 자유.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라 처음엔 마치 나쁜일을 하는 것처럼 망설여졌지만, 늘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자유를 만끽하던 어느 날, 문득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아이가 있는 가정을 볼 때였다.


결혼 전, 남편과 자녀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오빠는 자녀 계획이 있어?"

"낳으면 좋긴 한데... 난 여보 의견에 따를거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다. 아이를 열 달 동안 품고 낳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동안 몸이 힘들 수 있고, 하던 일도 잠시 멈춰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출산의 고통을 견뎌야 하고, 출산 후 변해버린 몸을 마주하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게다가 육아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일일 텐데...

이 모든걸 감내하면서까지 아이를 꼭 낳아야 할까?

겁이 났다. 그래서 결혼 전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그 고민은 결혼 생활 내내 이어졌다.


결혼 후 맞이한 두 번째 겨울. 남편과 떠난 유럽여행에서 한 모녀를 마주친 순간,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를 가질 준비부터 해야겠다.'


운명의 사랑을 만나면 종이 울리고 주변이 하얗게 변한다고 했던가?

아쉽게도 남편을 만났을 때 그런 경험은 없었지만, 그 모녀를 마주한 순간 세상이 뿌옇게 변했고,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그 모녀는 한 동상 앞에 서 있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일곱 살쯤 되어 보이던 아이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빤히 바라보며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눈빛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 어떻게 이런것까지 알고 있어요? 대단해요.'

'엄마랑 같이 여행하는 이 시간이 행복해요.'

'그리고 엄마... 정말 사랑해요.'


내가 낳은 아이도 아닌데, 우주처럼 맑고 깊은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걱정과 두려움이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눈빛 하나로 아이를 낳을 이유가 충분해졌다.


귀국 후, 조금이라도 건강한 몸으로 아이를 맞이하고 싶어 블로그를 뒤져가며 정보를 얻었다.

함께 엽산도 챙겨먹고, 필요한 접종까지 마쳤다.

아직 아이를 갖지도 않았는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임신과 출산에 관해 공부도 했다.

그리고 배가 불러오기 전 아이 방도 미리 만들어두고 싶어 로망 실현은 잠시 접어뒀다. 주말마다 대청소에 매진했고, 힘들어도 피곤해도 할 수 있는건 다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깨끗해진 방을 보니 문득 생각이 스쳐갔다.


'우리 엄마, 아빠도 나를 기다리며 이렇게 행복했을까?'



10년 넘게 함께 했던 반려토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슬픔을 잊으려 도망치듯 떠났던 유럽여행이었다.

그런 여행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모녀.
지금 돌이켜보면,
그 녀석이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온 게 아닐까 싶다.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이제는 자기가 함께 할 수 없으니
예쁜 아이를 낳아 또 다른 행복을 느끼며 살라고 말해주고 싶었나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꼭 그녀석처럼 맑고 깊었던 아이의 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꿈처럼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순간.

끝까지 선물만 주고 떠난 나의 작은 친구.
고마웠어. 언젠가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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