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폭설이 내렸습니다. 3월 말에 서울에 대설특보가 내려진 것은 관측 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출근길 도로는 극심한 정체를 빚고 있습니다.
교통 상황을 보도하는 기자의 뒤로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TV를 껐다. 그러곤 다이어리를 펼쳤다.
오늘 할 일은 두 가지다.
1. 재활용품 분리배출
2. 식료품 구입
“재활용품 내다 버리고 마트에 다녀오면 되겠군.”
늘 그렇게 해온 일임에도 한 번 더 순서를 정하는 건 긴 직장 생활에서 생긴 버릇이다. 그는 대기업 IT 팀에서 근무했다. 10년 전까지.
이제는 명실상부 재계 서열 3위에 이름을 올린 대기업이지만, 그가 입사할 때만 해도 규모가 작은 자회사였다. 그러다 운 좋게 모기업에 합병되었고, 시간이 흘러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통이 커졌다.
자랑스럽기보다는 위태로운 나날이었다. 재영이 입사할 때는 인 서울 대학만 나오면 충분히 합격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명문대에 토익 900점 이상, 해외 연수 경험이 없으면 입사 지원조차 힘든 회사가 되었다.
재영이 가르쳐야 하는 후배들은 하나같이 그보다 좋은 대학 출신에 영어도 잘했고 해외 경험까지 풍부했다. 심지어 집안마저 좋았다. 그래서 재영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회사를 사직하고 10년간 집에 은둔한 이유는 아니다.
재활용품을 버리고 마트에 갔더니 오전 11시였다. 막 오픈한 매장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재영은 이 시간에 장을 보러 온다.
사는 물건은 거의 같다. 시리얼 한 봉, 1000mL 우유 두 팩, 사과 세 알(이틀에 하나씩 먹는다), 식빵 한 봉지, 캔커피 그리고 초코바. 선호하는 브랜드는 없고, 1+1이거나 할인율이 높은 것을 고른다.
"어?"
그런데 오늘 마트는 아침부터 붐볐다. 네 개의 계산대가 모두 열려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재영은 마음이 급하고 불쾌해졌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사람을 피하며 물건을 담은 뒤 계산대로 갔다.
어디에 줄을 설까 망설이다가 1번 계산대를 선택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1번 계산대만 캐셔가 여자였다. 드세 보이지 않는 중년의 아줌마는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1번 계산대가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단거리 동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