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크레바스: 입맛의 미학 - 2
커피 취향의 변천으로 보는 감각과 정신의 변증법에 관한 힌트
제 첫 커피는 당연히 커피믹스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원두커피라는 용어는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고, 어른들이 식당에서 100원짜리 동전 몇 개로 뽑아먹는 밀크 커피를 마실 때, 옆에서 율무차나 마시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커피 자판기의 맛을 떠올리면, 요즘은 흔한 그 스틱도 나오지 않아서 다 마신 뒤엔 항상 바닥에 녹지 못 한 설탕들이 컵 바닥에 깔려있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물이 많을 때는 밍밍하다가, 끝에 갈수록 그라데이션으로 단 맛이 추가되었죠. 다 마셔갈수록 컵을 힘차게 흔들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커피가 아이들의 두뇌 발달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급적 마시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도서관이나 독서실 한편에 놓여있던 커피믹스나 300원짜리 커피를 사 먹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때는 다니던 학원에 교사들을 위해 아이스티나 커피믹스 스틱이 구비되어 있던 걸 몰래 먹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막 편의점에 페트병 형식의 커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한때 도토루 커피를 즐겨 마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십 대 시절에는 맛은 떫고 씁쓸하지만 향이 좋았던 홍차와 단 맛으로 먹던 커피 취향이 공존하던 신기한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당시를 돌아보면, 차와 커피에 대한 취향이 극명하게 갈린 이유는 사실 뻔했습니다. 제게 차는 이미 취미의 영역이었고, 인터넷과 도서관 등을 통해서 차에 대해 이런저런 공부를 했기 때문에 소위 "좋은 차"에 대한 이론적 학습이 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돈 버린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차를 더 자주 마시면서 새로운 맛과 향에 대한 감각에 익숙해지기 위한 훈련도 한 셈이지요. 즉, 이미 제 나름대로의 뇌이징이 된 상태였기 때문인 거죠.
그 당시의 커피는 제게 적당히 달짝지근한 커피우유와 별 차이도 없이 소비되던 당 보충을 위한 음료였던 셈입니다.
저는 한 번 입시에 실패한 전적이 있어서, 강남 쪽에서 재수를 했습니다. 재수학원을 다니면서는 학원 근처의 카페에서 카페모카 류의 음료를 종종 마신 기억이 있습니다. 커피가 제 취미의 영역까지 올라오게 된 것은 그로부터 1, 2년 뒤입니다.
제가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하여 새내기 대학생활을 보내던 그 해, 제 커피 취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교 앞 단골 카페에 첫 발을 딛게 됩니다. 그전에 있던 가게들이 망하고, 새롭게 들어선 카페는 한눈에 봐도 세련되었고,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보던 에스프레소 배리에이션 이외에도 홍차를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브랜드의 홍차가 있길래, 저는 커피 대신 홍차를 주문해서 마셨습니다.
예쁜 티팟에 우려나오는 홍차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저는 카페 사장님을 비롯한 다른 직원분들과도 친해지면서 홍차 외에도 다양한 음료를 테이크아웃해 가며 대학생활을 보냈지요. 대학 시절, 누구와 만나면 항상 이곳에 갈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제 사랑방이나 마찬가지였죠.
카페모카 같이 달달한 음료 이외에도 아메리카노를 두 종류로 나누어 팔던 것은 제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요즘에야 그렇게 산미가 있는 커피와 고소함과 바디감을 중시한 커피를 나눠서 제공하는 곳이 많지만, 당시에는 드물었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저는 산미에 굉장히 예민해서, 소위 팬시한 커피들의 산미는 거부감이 심하게 들어서 적당한 중, 강배전의 바디감과 고소함이 좋은 커피를 선호했습니다. 핸드드립을 마실 땐 에티오피아 같은 곳의 원두가 아니라 만델링 같은 종류의 원두를 선호하곤 했지요.
이후, 다양한 카페를 다니면서 질 좋은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와 핸드드립을 마시며 제 입맛을 형성하는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산패된 신 맛과 기분 좋은 산미를 구분하게 되고, 내추럴 커피의 발효취와 향으로부터 제가 좋아하는 발효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반복되는 것에 쉽게 질려하는 제 성향은 여기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루틴이라고 여기는 것과 취미라고 여기는 것을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제게 루틴화 된 소비는 소비하면서 느끼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습관화된 소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반복되는 것에 금세 질리는 제 성향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 소비에 제가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요.
한편, 제가 좋아하는 것을 소비할 때는 반복되는 감각에 쉽게 질려합니다. 소비행위 자체에 관심을 갖고, 집중해서 소비경험을 누리고, 분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기에 제가 좋아하는 것을 최대한 많이, 다양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다양한 개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제 커피 취향도 다양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저는 항상 제게 다양한 경험을 맛볼 수 있게 도와주는 동호인이나 업계분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안목과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로운 동네에 방문하면 언제나 그 동네의 카페나 찻집을 방문합니다. 질 좋은 식음료를 제공하는 곳이면 그분들께 동네 맛집이나 먹거리, 볼거리 등을 추천받으며 다양한 얘기를 나눕니다. 그분들의 안목을 통해 더 나은 경험을 할 수 있기에 방문이 너무나도 즐거워집니다.
이제 잠시 지금까지 나눈 얘기를 반추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어릴 적 홍차는 취미로써 자주 의식적으로 즐기고,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취향을 정립해 나갔으나, 커피 취향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홍차는 내게 '취미'로써 인식되었지만, 커피는 단순히 소비 영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커피를 취미로써 인식하게 된 것은 그것을 함께 즐기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 덕분이었다. 특히 다양한 맛과 향을 경험하고, 관련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와의 소통이 취향을 정립하고, 안목을 기르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셋째, 홍차건 커피건 안목과 감각은 많이 즐기면서, 의식적으로 감상하려는 태도가 함께 할 때 비로소 길러진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탁월한 감각적 체험이 정신적 충만함을 제공하지만, 감각적 체험의 탁월성을 알기 위해서나 제대로 감각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정신적인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저 소비에 집중한 상태에서는 내가 느끼는 것을 제대로 감각하지 않고 흘려보내게 된다.
무언가를 제대로 감각적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정신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쯤 되면 감각적 만족과 정신적 만족 사이에 어떠한 변증법적 관계성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다른 취향들의 변천을 통해 이런 느낌적 관계성을 좀 더 언어화해보도록 하자.
여러분이 좋아하는 음료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어떤 종류의 감각과 경험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아하시나요?
에스프레소 배리에이션 (Espresso Variation) : 고온 고압 추출 방식인 에스프레소 방식으로 추출한 커피를 이용해 만드는 커피 음료들의 통칭.
핸드드립 커피 (Hand-drip Coffee) : 일본에서 정착한 용어지만 요즘은 필터 커피(Filter Coffee)라는 표현도 글로벌하게 사용된다. 주로 종이 필터와 천 필터를 사용하는 경우로 나뉜다. 많은 경우 블랜딩 된 커피보다는 단일 산지/품종 원두를 이용해 커피를 내릴 때 사용한다.
내추럴과 워시드 커피 (Natural, Washed Coffee): 가공 중에 커피 체리의 과육 제거 여부를 나타낸다. 요즘은 다양한 발효과정을 이용해 가공하기 때문에 다 같은 내추럴이 아니다. 대체로 워시드 커피인 경우 맛이 깔끔하다. 내추럴은 생두 보관에 따라서 발효가 진행되기 때문에 맛으로 발효 정도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유산균 음료를 마시는 느낌과 점성이 특징. 발효가 많이 진행된 경우에는 "과발효취(장 맛)"이 난다.
뇌이징: 뇌 + 에이징(aging)의 합성어로 어떤 감각에 대해 뇌가 길들여지는 것을 헤드폰의 진동판을 길들이는 에이징에 비유한 표현.
글 목록: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1 :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두려움
2부 취향 크레바스 - 2 : 너 자신을 알라, 그 첫걸음
4부 돌아가는 펭귄 드럼 - ?? : 삶을 위한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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