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크레바스: 입맛의 미학 - 3
입맛의 미학 - 3
성인의 취향을 다루는 데 있어 술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지요.
저는 한 가지만을 깊게 추구하기보다는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즐기는 것을 선호합니다. 취향에 있어서도 나름 폴리매스를 추구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누군가에겐 겉멋만 든 주댕이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크게 저는 맥주부터 시작해서 와인, 위스키, 일본주(사케), 증류식 소주, 브랜디, 백주 등 다양한 술을 좋아합니다.
술에 대한 첫인상은 시골에 있는 조부모님 댁에서 친척 어른들이 마시는, 아이들에겐 금지된, 마셔서 좋을 게 없는 음료였습니다. 그랬던 술이 제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중학생 때 읽은 악명 높은 만화 <신의 물방울> 덕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술조차도 책으로 먼저 접한 케이스였습니다. <신의 물방울>에선 과장되고 환상적인 묘사로 와인 맛의 다양한 요소들을 표현하는데, 마치 한마 바키의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을 듣는 느낌이었죠.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스페인 와인을 마시면서 안달루시아의 양치는 목동과 일하는 아낙네들이 보인다는 식으로 떼루아 등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스토리 작가인 아기 타다시는 한국에선 <소년 탐정 김전일>로 알려진 <킨다이치 소년의 사건부>와 <탐정 학원 Q>등의 스토리를 맡은 아마기 세이마루인데, 스토리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이미 아는 상태여서, 저는 엄청 몰입해서 읽었지요.
만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시 만화 얘기를 해보자면, 제가 미식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기저에는 아직도 연재 중인 <맛의 달인>을 비롯해 <요리왕 비룡>, <미스터 초밥왕> 등의 다양한 요리 만화의 영향이 없다고는 하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요리만화를 읽는 것을 통해 맛 표현을 통한 현실적인 맛을 상상하는 훈련이 된 것 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보지요.
만화로써의 즐거움과 다양한 와인들에 대한 소개 등에 힘입어 저는 다른 종류의 와인 관련 서적들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습니다. 신기한 점은 주류에 관한 서적도 중, 고등학교 도서관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술이 청불이지 술에 대한 책이 청불이 아닌 탓이지요. 그 당시에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올 댓 와인>이라는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매체로 접한 차 맛의 묘사와 실제 제가 느낀 차 맛의 괴리를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미각이 적절히 훈련된 후에는 매체로 접한 묘사의 정확성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구분할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저는 커피든, 차든, 술이든 컵 노트를 신뢰하는 편입니다. 물론 당시에 와인의 맛을 알 수는 없었으니, 차를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 이런 묘사면 어떠한 맛과 향이 느껴질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제 나름대로 감각 기억과 묘사의 간극에 대한 캘리브레이션을 수행한 셈이지요.
위스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년 뒤의 고교생 시절입니다. 일본 소설을 좀 접해봤다 싶으면 다들 눈치채셨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소설과 에세이 <위스키 성지 여행(당시 제목)>의 영향이었죠.
저는 그 당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나온 <노르웨이의 숲>을 비롯해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그의 소설들을 다수 읽고 있었습니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나 <도쿄 기담집>이라거나, 그 외 다양한 책을 읽었지요. 여전히 그의 장편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단편과 에세이를 좀 더 좋아합니다. 더 이상 10대, 20대가 아니라는 방증이겠지요.
술이라는 음료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물을 베이스로 지용성 향미성분들을 어우러지게 해주는 유기용매인 알코올이 적당히 섞여서 다양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음료입니다. 하지만 알코올, 정확히는 에탄올, 자체도 쓴 맛이 있고, 기화된 에탄올이 점막을 자극해서 맛과 향을 즐기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지요. 저는 에탄올이 주는 감각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학생 때 우연히 얻게 된 잭 다니엘 한 병을 몰래 야금야금 마시면서 알코올 너머에 있는 (테네시) 위스키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와인이 산화하지 않게 막아주는 코라뱅 같은 장비가 있었나 없었나 알지도 못 한 시절인 데다가, 어느 정도 가격대가 있지 않으면 맛이 없었던 드라이한 와인들보다는 첫 잔의 알코올 자극을 넘기면 다양한 맛과 향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위스키를 훨씬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은 해도, 대학 다닐 때 술을 마신 날이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게 제게도 놀랍군요. 이렇게 돌아보니 제게 술은 처음부터 일종의 <취미>나 <문화>의 영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사실 여러분들도 제가 어떻게 다른 종류의 술에도 관심을 갖게 됐는지가 명약관화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아참 고대 그리스의 심포지온은 애초부터 포도주 같은 술을 마시면서 토론하는 자리였다고 하니, 학술대회가 학술대회인 것도 나름 역사가 있는 전통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다음 글에서 제 주류 취향의 변천을 좀 더 복기한 다음, <차, 커피> 때 했던 논의를 조금 바꿔서 해보려고 합니다.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져서 코끼리의 윤곽을 파악하려면, 엄청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코라뱅 (Coravin) : 공기보다 밀도가 높은 비활성기체를 사용하여 와인 병 안의 공기를 밀어내어 와인이 산화하는 것을 방지해 주는 장치. 얇은 바늘을 이용해 코르크를 제거하지 않고 잔에 따라 마실 수 있는데, 장치를 제거하면 코르크가 부풀면서 바늘이 지나간 자리를 메운다고 한다.
잭 다니엘스 (Jack Daniel's) : 저렴한 테네시 위스키. 캐러멜과 바닐라 향이 나며 단 맛이 특징적인 미국 위스키(Whiskey).
캘리브레이션 (Calibration) : 표준적인 결과를 이용해서 계통 오차를 수정하는 행위. 모니터의 색감 등의 캘리브레이션이 대표적인 용례. 일종의 영점 조절.
올 댓 와인 : 국내 최초의 와인 경매사인 조정용 작가의 와인 입문서. 지금은 시리즈로 나온 모양입니다. 나온 시점을 보니 나름 따끈한 신간을 읽었던 것 같네요.
글 목록: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1 :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두려움
2부 취향 크레바스 - 2 : 너 자신을 알라, 그 첫걸음
4부 돌아가는 펭귄 드럼 - ?? : 삶을 위한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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