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크레바스: 입맛의 미학 - 4
차와 커피에 다양한 가공 방식이 있듯이 술도 원재료와 가공 방식에 따라 다양한 술들이 있죠. 저는 다양한 장르의 술을 즐기는데 맥주, 일본주와 같은 발효주에서부터 위스키, 전통 및 일본 소주, 아와모리, 보드카를 비롯한 다양한 리큐르 (Liquor) 같은 증류주도 그 강렬한 도수에도 불구하고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술의 취향을 찾는 일은 차, 커피 취향을 정립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게 다양한 주종을 접할 수 있도록 가이드해 줄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포함되겠지요.
이러한 취향에 대한 얘기는 구별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항상 아비투스에 대한 논의로 빠지기 마련이지요. 특히 충분히 많이 접해서 감각을 벼리고,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런 경험을 가질 수 있는 재화나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는 와인의 경우 이러한 경험을 갖는 것 자체에 심리적 부담이 있었습니다. 혼자 마시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한 번 따면 다 마셔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먹을만한" 와인들은 향이 충분히 발현되도록 어느 정도 시간을 요한다는 점도 있었지요. 따라서 와인은 적절한 가격대의 와인바에 가서 마시거나, 누가 사주거나, 그도 아니면 여느 행사 식사에 제공될 때 마시는 것이 제 와인 입문 과정이었습니다.
오히려 도수가 높은 위스키는 제 입문 시기가 훨씬 일렀는데, 한 병의 가격은 비싸더라도 한 번 사면 오랫동안 조금씩 마실 수 있었기에 오히려 제 입맛과 취향을 더 일찍 형성해서 다른 친구들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국내가와 면세가의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해외 출장길에 오를 때면 귀국할 때 한 병씩 사 오곤 했습니다.
제 첫 해외여행은 석사과정 때 참석한 첫 번째 해외학회였는데, 귀국할 때 현지 면세점에서 구매한 꼬냑이 제 첫 술구매였습니다. 그 당시에 글렌모렌지에서 나온 엔트리급 싱글몰트 위스키와 레미 마틴 VSOP를 사이에 두고 열심히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아예 해외에서 살고 있지만,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교환 학생,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을 마냥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학회를 다니면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지만, 일본어로 적당히 떠들어댈 줄 아는 능력 덕분에 일본친구들과 특히 더 가깝게 지내곤 했습니다. 덕분에 일본에서 열리는 학회에 다녀올 때면 그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일본주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특히 비교하면서 마시는 로컬 사케 샘플러(地酒飲み比べ)를 좋아했지요. 덕분에 내 입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일본주들을 분류해 나가면서 제 취향을 정립했지요.
이후에 일본에 살 때에는 한국에 비해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와인, 일본주, 위스키를 마셔보고, 바나 이자카야에서 현지인 친구를 사귀기도 했습니다.
이런 취향의 변천을 되짚어보니, 제 사회, 문화적 배경이 어느정도 들여다보이는 것이 소름이 끼치네요.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다음 글에서는 이번 글에서 발견한 크레바스인 "진입장벽"에 대한 태도에 대해 얘기해볼까합니다. 아비투스를 나누는 진입장벽과 그에 대한 제 태도를 되돌아보는 것을 통해서 제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되네요.
아비투스(Habitus) : 이전에도 언급했던 부르디외를 통해 널리 알려진 개념으로 한 사람이 받은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담이지만 프랑스어 발음도 어원이 되는 라틴어 발음도 아닌 혼종이라 개인적으로 더 정감이 가는 한국어 표현이다.
샘플러 (Sampler) : 다양하게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식음료를 제공하는 방식. 모둠이라고 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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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목록: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1 :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두려움
2부 취향 크레바스 - 2 : 너 자신을 알라, 그 첫걸음
4부 돌아가는 펭귄 드럼 - ?? : 삶을 위한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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