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이 좋았다. 그래야 겨울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이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지내면 겨울이 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요즘에는 기상악화로 눈을 볼 수 있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내가 군산에서 지낼 때 눈과 함께한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학교 뒷문 쪽으로 달려 나가 눈싸움을 하기도 했고, 선배들은 계단이 있는 창고건물 계단 틈을 눈으로 다듬어 썰매장을 만들기도 했다.
이건 황당한 경험담이지만, 주택에 지낼 당시 군산은 폭설이 자주 내리는 편이었다.
아침에 방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다들 어디 갔지.. 하며 눈을 비비며 마당 문을 열었는데 온 사방이 흰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밤사이 내린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당 기둥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한동안 마당 지붕 없이 다녀야 했다.
그런 황당한 일을 겪고도 나는 눈이 좋았다.
물론 여러 번 짓밟혀 흙탕물이 되어 버린 눈은 싫었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내려 무릎, 허벅지까지 쌓여있는 눈은 기분이 좋았다.
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이상하게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날은 왠지 더욱 나의 가난을 들춰내는 것 같았고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릴 때면 이 추위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안심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고, 출퇴근을 시작하고. 더 이상 눈이 내려도 설레지 않는다.
오히려 입 밖으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당장 내일의 출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불 밖은 위험한데 눈길에 출근길이 막힐 것을 생각하면 빨리 일어나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뜩이나 끔찍한 출근길이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군인의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도 한다. 치워도 치워도 끝도 없이 쌓인다.
눈이 더 이상 반갑지 않은 건 어른이 되었다는 걸까.
어린 시절 내가 바라던 어른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초라했다. 어른이 되면 돈이 무섭지 않을 줄 알았지만 오히려 어린 시절보다 돈이 더 무섭다. 한 달 열심히 일을 한다. 돈을 벌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대부분은 무관심하게 여기며 지나가도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분한 마음을 담아 쏟아낸다.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자신들의 분함을 받아내는 이들도 본인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은 것처럼 쏟아낸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처럼 여기며 위로의 말과 따뜻함을 건넨다. 그렇게 한 달 치열하게 살아간 보상으로 월급이 들어오지만 그마저도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
왜 이리 카드값이 많이 나오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아 내역을 살펴본다. 전부 다 내가 사용한 것이 맞다. 헛웃음만 나온다. 결국 가성비를 좇아 살아간다. 출근길은 여전히 마음이 무겁고, 덩달아 발걸음도 무거워진다. 그렇기에 눈이 내리면 나의 분을 괜히 눈에게 돌린다.
크리스마스에는 이 모든 생활을 잊고자 한다. 이날만큼은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하고 싶다. 현실을 잠시 벗어내어 한편에 두고 이날만큼은 눈이 오길 기대한다.
우습게도 평소엔 잘만 쏟아지던 눈이 내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시기가 되면 뉴스에 귀를 쫑긋 세운다.
"올 겨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는데요~"
그 말 한마디를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