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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y 19. 2024

마흔 된 김에 한라산(2) 결국 해낸다는 것

긴장은 설렘으로

새벽 3시 30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걱정과 긴장 때문에 선잠을 잔 탓이다. 충분한 수면을 채우지 못한 것 같아 더 긴장이 됐다.

어두컴컴한 새벽, 우리는 한라산으로 출발했다.

차로 40분 간 달려 도착한 한라산 입구, 아직 5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입구에 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청명한 공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느새 긴장은 기분 좋은 설렘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벽 5시, 동트기 전 하늘은 어두웠다. 핸드폰 플래시로 길을 비추며 오르기 시작했다.

한라산은 우리 부부의 발소리와 상쾌한 새소리로 가득했다.


내 페이스를 안다는 건 나를 아는 것

속밭 대피소부터 진달래 대피소까지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 코스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가방에서 무릎 보호대와 스틱을 꺼내는 걸 보고 우리도 따라서 장비를 착용했다.  

거창한 장비로 무장을 하니 덩달아 긴장이 됐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인가 보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이 정도면 할만한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힘들긴 하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도 않았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도 않았다. 청계산처럼 지옥의 계단도 없었고, 관악산처럼 경사가 심하지도 않았다.

‘이거, 오히려 쉬운데? 나 등산 잘하네?‘  

자신감이 붙자 속도가 붙었고, 등반 시간을 줄이고 싶은 욕심이 났다.

‘보통 왕복 8시간이라고 했으니, 나는 7시간 30분 안에 끊어볼까?’


우리와 비슷한 페이스로 오르는 사람들을 따돌리고 스쳐갈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그럴수록 뒷사람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속력을 더 높였고, 우리를 앞질러간 사람들을 쫓아 따라잡을 생각뿐이었다.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벌써 아침 8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속도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대피소에서 사진도 찍고, 챙겨 온 간식도 먹으며 충분히 휴식을 취했지만 우리도 잠시 쉬다가 곧 일어났다. 여기서 쉬느니  빠르게 올라가서 정상에서 쉬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이 즈음부터 조금씩 지쳤던 것 같다.

진달래코스를 지나면 거의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이때부터가 진짜 체력전이라는 걸 몰랐다.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 한 30분쯤 올라가면 길고 긴 계단이 나온다. 밑에서 보면 끝도 없는 천국의 계단처럼 보였다. ‘저길 내가 올라가야 한다고?’

눈앞이 막막했지만 백록담을 보기 위해서는 그저 묵묵히 그 계단을 오르는 수밖에 없다.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바닥만 보고 걸었다. 걷고 걷고 오르고 또 올라도 도저히 계단은 끝나지 않았다.

설상가상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체온도 떨어졌다.

한라산은 날씨가 시시때때로 변한다더니 이대로면 백록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백록담을 보고 안 보고는 나한테서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이미 나는 계단을 거의 기어서 올라가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계단의 끝이 드디어 보일 때쯤 백록담이라고 적힌 정상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백록담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사진을 찍기 전에 그것부터 확인하러 돌진했다. 그리고 눈앞에 분화구 정상에 고여있는 백록담이 펼쳐졌다.

생각보다 선명하고 청명한 백록담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예상 밖의 감동이었다.


산을 오를 때 체력을 다 써버린 탓에 하산할 때는 4시간도 넘게 걸렸다.

발바닥은 돌 하나하나를 느낄 만큼 예민했고, 걸을 때마다 발목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무릎 아래로 퉁퉁 부은 종아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우리보다 늦게 정상을 찍었던 사람들이 속속 나를 스쳐 내려갔다.

페이스를 조절하지 않은 내 탓이다. 내가 나를 모르니 체력 분배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몰랐다.

시간은 이미 8시간을 넘겼지만 걸어도 걸어도 입구는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 앉아 울고 싶었다. 몇 시간 전 ‘할만한데?’ 라고 오만방자를 떨었던 나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딱 눈물이 나오기 직전 저 멀리 입구가 보였다.  


엄두도 안 나던 일을 해낸다는 것

‘내가 한라산을 간다고? 내가?’

한라산을 오르기 전까지 계속해서 나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내가 할 수 있을까? 8시간 동안 산을 타는 게 가능할까?’

사실 전날까지도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힘들면 중간에 내려오자는 생각이 첫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해냈을 때의 기분이란?

힘들어 죽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역시 인간이 못 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면 된다 ‘는 인생의 진리에 다시 한번 고개가 끄덕여졌다.

결국 ‘해내는 사람’은 ‘시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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