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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Apr 18. 2023

기분이 처지는 날엔 그냥 처지는 대로 있어보자


아침엔 크랜베리 시리얼, 달걀프라이, 방울토마토 7알을 먹었다. 가끔씩 아침에 남편은 누워있는 내 코앞까지 시리얼을 가져다준다. 결혼 전까진 이불에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어릴 적에 이불을 덮고 아침을 먹으면 아빠에게 호되게 혼났다. (이 말을 들으면 엄마는 “너는 참 기억력도 좋아. 아빠가 잘해준 건 다 까먹었지?”라고 말하겠지.) 어쨌거나 남편이 가져다주는 아침은 참 좋다. 귀한 사람대접받는 것 같고, 넘치게 사랑받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자꾸 남편에게만 매달린다. 남편은 이런 변화가 싫지 않은 것 같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나는 주말까지 약속을 꽉 채워 잡아 에너지를 대량 방출한 다음에 집에 와 곯아떨어지고는 했다. 코로나 이후엔 대왕집순이에 남편바라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일상이 참 편하다.


아침을 다 먹고 남편 볼과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엉덩이를 두들겼다.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오늘은 월요일 아침. 남편은 출근해야 한다. 출근하는 남편을 마중하고 다시 이불에 누웠다. 스벅에라도 갈까? 하지만 미세먼지는 ‘매우 나쁨’.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났다. 어제 아기엄마인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출산 전까지 많이 돌아다녀야 해. 아기 태어나면 꼼짝 못 해.” 나도 그러고 싶다. 경주나 강릉, 속초… 한 번 더 바다를 보고 오고 싶다. 예전에 혼자 경주를 여행하며 먹었던 따뜻한 물쫄면이 생각난다. 하지만 경주는 시댁 근처니까 경주만 쏙 다녀올 순 없다. 얼마 전 불이 난 강릉에 놀러 가는 것은 실례다. 부모님은 내게 이젠 집에 얌전히 누워있으라고 한다. “아기가 언제 나올지 몰라. 너도 38주에 나왔다니까!”


오늘 오후엔 침대 매트리스를 보러 가구거리에 가야 하고, 열흘 뒤엔 이사해야 한다. 초음파 앨범 정리, 출산 가방 싸기, 아기 침대 사기, 버릴 책과 옷 따로 빼놓기… 잔뜩 미뤄놓았던 할 일이 그득하게 쌓여있다. 월말엔 토익도 신청해 놓았다. 책은 거의 못 펼쳐봤다. 이렇게 누워만 있다가 깨어나 노을색으로 물드는 창밖을 보면, 기분이 착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핸드폰으로 KBS클래식 FM을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몇 장 못 읽고 잠들었다. ‘띠링~’ 문자음이 울려서 깼다. 부동산 사장님이었다. “아침 10시 반에 집 보러 가도 되죠?”


10시 20분, 똑똑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종종 5분, 10분쯤 일찍 오는 부동산 사장님… 나는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다가 놀라서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키가 작고 앳된 대학생이 부동산 사장님과 함께 들어오며 서너 번 말했다.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은 2~3분 둘러보더니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했다. ‘그런가…?’ 싶은 마음이 1/3, ‘이 집이 왜 마음에 들지?’ 1/3, ‘좀 더 꼼꼼히 둘러보지.’ 하는 마음이 1/3씩 들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나가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집은 다 나갔는데 왜 이 집만 안 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여태껏 15명쯤에게 집을 보여줬다. 사실 우리야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계약 끝나는 날에 보증금을 받고 나가기로 전세 계약서에 명시해 놓았다. 그런데도 나는 최대한 협조하고 있다. 부동산 연락을 받으면 한 번 더 집을 청소하고 창틀을 닦고 환기한다. 장미향 인센스도 피워 놓는다. 하지만 부동산 사장님은 올 때마다 집 안 빠지는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순진한 학생들이 지금 사는 우리 집이 좋다고 오해할까 봐 마음에도 걸린다. 학생들이 집을 보러 오면, 부동산 사장님은 자기도 모르는 애매한 것을 진실처럼 말한다. “집주인이 친절해요.” (아니, 불친절하다.) “화장실 수리가 다 돼 있어요.” (우리가 처음 올 때도 낡아 있었고 지금도 낡았다.) “냉장고와 세탁기는 옵션인데 아주 괜찮죠?” (냉장고는 추측컨대 1990년대 초반 상품 같다. 나는 그냥 엄마가 사준 김치냉장고를 쓴다. 옵션인 세탁기와 가스레인지도 낡고 낡았다.) “이분들도 여기 4년이나 살았어요.” (좋아서가 아니다. 전세대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장했다.)


비싼 보증금에 월세까지 내고 들어올 학생들의 얼굴을 보면, 이렇게 외치고 싶어 진다. “저기…. 집주인은 친절하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아련한 얼굴로 한 마디 더할 뿐이다. “물어보고 싶은 것 다 물어보세요.” 그럼 학생들은 “괜찮습니다~”하고는 다신 나타나지 않는다. ‘어휴, 나는 할 만큼 했다’ 생각하며 부동산 사장님과 손님을 마중하고 다시 누웠다.


저녁에는 남편과 가구거리에 가기로 했다. 이삿날에 맞춰, 침대 매트리스도 함께 사다리차에 올리려고 한다. ‘하…. 이사 갈 집 계약은 두 달 전에 했는데, 이사 열흘 전에야 부랴부랴 매트리스를 보고 있다니. 이렇게 시간이 많았는데.’ 또 한 번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하태평 남편 얼굴이 아른거렸다. 새로 이사 가서 우이동 엠티촌처럼 간이 이불을 깔고 쪽잠을 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 이 집에 이사 올 때 처음 일주일도 그랬다. 하지만 남편의 좋은 점은 정말 많다. 이런 것 때문에 남편에게 더는 뭐라고 불평하고 싶지 않다.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이사 갈 집에 들어갈 냉장고를 사주기로 했다. 엄마가 돈을 보내줬고 내가 쿠팡에서 주문하기만 하면 되는데, 며칠 사이에 똑같은 냉장고가 15만 원이나 올라버렸다…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나는 구구절절 엄마에게 가격 변동 사항을 읊어줬다. “왜 그날 바로 주문하지 않은 거야? 이사 날에 냉장고 못 들어오면 어떡해?” 엄마의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들으니 또다시 기분이 꿀꿀해졌다. “나도 몰라. 지나간 것 후회해서 뭐 해.”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다가 한층 더 속상해졌다. 이러고 나면 찔려서 몇 시간 뒤에 엄마에게 다시 전화한다. 엄마에게 다시 전화해 찌글찌글한 목소리로, 아깐 짜증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지금 운동하고 있다면서 밝은 목소리로 나를 디스 했다. "괜찮아. 늘 있는 일이잖아. 잘 먹고 푹 쉬기나 해."


임신 기간에 줄곧 기분 좋게 지냈으니까, 기분이 처지는 날도 하루쯤은 있어도 되겠지.

기분이 처지는 이유를 파고들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적어놓으니까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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