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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옥 Mar 21. 2021

세상을 열어 준 여든 권

한글 계몽 전략의 선견지명

어린 시절 옥섭 씨는 계몽사에서 만든 40권짜리 위인전 한 질과 한국 전래동화, 세계 명작동화 각 스무 권짜리 전집을 사주었다. 책 따위에 돈 쓴다고 희경 씨가 난리를 칠까 봐 옥섭 씨는 동화책은 장롱 속에 숨겼다. 나에게 '아빠 몰래 읽으라'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이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읽을거리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닌 반복 읽기 덕분에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크림전쟁에서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는 사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세기의 파트너였다는 것, 유일한 박사가 세운 유한양행의 역사를 나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한참 전부터 알았다. 동화책 중에서는 푸른 수염의 거인 스토리를 제일 좋아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집은 너무 강렬해서 그 달콤한 집의 맛을 매일 상상했다. 당시 그려낸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친 진짜 먹어본 것처럼.


열심히 읽었던 그 책들은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사회 공부를 딱히 하지 않아도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아는 상식이 많았다. 어휘력도 풍부해서 가끔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였다. 얼마 전 기획했던 홍보 프로그램으로 동화를 비트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게 다 그때 '아빠 몰래' 읽었던 책이 바탕이 됐다.


옥섭 씨는 나에게 한글 하나만큼은 제대로 가르쳤다. 일부러 한글을 가르치는 미술학원에 보냈고, 바쁜 와중에도 한글 쓰기를 똑바로 훈련시켰다. 길을 갈 때면 간판을 읽어주고 뜻을 설명했다.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가제를 랍스터로 안단다. 사교육비로 수십, 수백억씩 쓰는 나라에서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오히려 정보가 넘쳐서, 아이들이 단편적인 영상이나 이미지에 더 익숙해서 그렇단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나마 대놓고 읽지도 못했던 여든 권의 책은 내 가슴속 서러움과 한으로 남았더랬다. 책 많은 친구 집 가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나는 가진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읽었는데, 지금 친구들은 읽을 것이 너무 많아서 읽지를 않는다니. 


새삼 나를 위한 옥섭 씨의 한글 계몽 전략이 고맙게 느껴진다. 덕분에 나는 한글로 밥 벌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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