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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연 Nov 16. 2021

끝없는 대화

소곤소곤 몽글몽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운 것을 꼽자면 나는 ‘대화’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아들이 배 속에 있을 때도 대화를 시도했고, 누워서 버둥거릴 때도 대화했고 옹알이를 시작할 때도 대화했다. 그런데 아들은 아기 땐 막무가내로 떼를 부렸고, 유아기 시절엔 바닥에 누워서 우는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 그때마다 대화를 시도했지만, 속 시원한 대화를 한 번도 나누지 못했다.

 대화란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라는 뜻이다. 즉, 일단 마주 대해야 하고 이야기는 한 방향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이른바 ‘대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난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냈고 아이도 대답했지만, 우린 제대로 된 대화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대화라기  보다는 아이를 설득하기 위한 엄마의 고군분투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3학년이 되고 나니, 행복하게도 약간의 대화가 가능해졌다.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 말을 듣는 내 반응을 살피기도 하고, 사실 전달을 넘어서 자신의 감정을 말해주기도 하니 더할 나위 없다. 그렇지만 어떤 한계에 부딪히거나, 기분이 상하면 또 아들은 입을 닫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내가? 나?”

 아이의 마음을 살피고픈 엄마의 마음이 딱딱하고 묵직해진다. 


 강아지와도 대화를 시도 중이다. 대화라면 우습지만, 녀석에게 무언가 나의 의견을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물은 사람보다 원초적이고 솔직해서 직선적 대화를 주로 하므로 생각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아지는 배가 고프면 밥그릇 앞에서 짖고, 물이 다 떨어지면 물그릇 앞에 엎드려서 ‘쨍’하고 찢어지는 소리로 운다. 양쪽 귀를 뒤로 한껏 젖히고 무릎 앞에 앉아서 컹컹 짖으면 뭔가 먹고 싶다는 신호. 물론 대부분의 짖음은 먹고 싶거나 나가고 싶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그것마저도 나의 해석일 뿐이지만. 

 한 손에 간식을 들고 있으면, 그 어떤 명령도 제대로 실행하고자 애쓴다. “앉아!” 하면 앉고, 앉았는데도 간식을 주지 않으면 자동으로 엎드린다. 그래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앞발을 하나씩 들었다가 내리고 배를 보이고 발랑 드러눕기도 한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얼른 간식 하나를 입에 넣어주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휴지를 다 풀어놓은 현장을 적발하고, “누가 그랬어?”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거실 어디선가 몸체를 낮추고 어슬렁어슬렁 강아지가 움직인다. 날카롭게 째려보면 슬슬 시선을 피한다.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건가? 신기하기도 귀엽기도 하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차차 부모를 자기 공간 밖으로 밀어낸다고 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대답도 점차로 짧아진다고들 한다.  워낙에 엄마에게 애착을 보이는 아들에게도 분명 그런 시간이 오겠지만, 난 벌써 두렵다. 아들과 밀도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면 두려움이 작아질 것 같긴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강아지를 끌어안고 혼잣말을 한다. 날씨가 덥다, 입맛이 없네, 넌 아까 왜 그랬니 하다 보면 강아지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마치 다 알겠다는 듯이. 내 일이 늘어갈 것이 분명해서 강아지를 거부했던 처음이 생각났다. 거부하다가 결국 받아 안게 되었을 때, 오랜 시간 강아지를 키웠던 친구가 말했다.

 “넌 이미 빠져들었어.”

 맞다. 난 그런 것 같다. 차분하게 정돈된 강아지의 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이상한 안정감에 젖어 든다. ‘너’를 통해 ‘나’와 대화할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완벽한 파트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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