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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왕자 aka C FLOW May 11. 2021

아빠는 왜 장애인이야?

아빠가 아빠라는 것 증명하기

초2, 9살 된 아들이 7시까지 놀다 온다 했는다. 집에 오지 않아 놀이터에 갔다.


아들 친구: ,  지성아, 친구 왔어


아들: 친구 아니야, 아빠라고!


씩씩대며 내게로 오는 아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집에 가는 동안 울먹이는 아들을 보며 말했다.


나: 지성아, 친구는 아빠가 아빠인지 모를 수 있는 거잖아?


아들: 왜 난 아빠를 일일이 설명해줘야 해?


나: 지성아. 그게 아빠의 몫인데,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몰랐다.


그럼에도 아빠가 아닌 친구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예전과 다른 지성이다.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고서도 아빠가 아빠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것이 인식개선이라면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다. 장애 정체성이고 나발이고 현실은 그렇다.


아들 지성이가 성장하면서 아빠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의 가장 큰 이유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들의 반응은 아빠의 존재가 아니라 아빠의 장애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간에 이는 우리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르지 않다. 아들이 태어나서 줄 곧 아빠의 휠체어, 아빠의 작은 키,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모습 등을 보며 자라왔다. 긍정적 장애인식 단계에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부정적인 것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 같다.

장애인식개선 교육 중 아들은 친구의 손을 잡고 점자유도 블럭을 따라 걷고 있다. 진지하다. 장애체험은 아들, 친구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장애체험은 장애만을 강조한다.

장애유형이 어떻고 특성이 어떻고 하는 것은 정보제공일 뿐이지 인식개선 교육을 위한 과정 중 하나라고 보기 힘들다.


아들 지성이가 친구에게 '아빠는 지체장애인으로서 전동휠체어를 타며 이동하는 장애 특성을 갖고 있어'라고 하는 것은 아빠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장애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장애와 사람을 분리시킬 뿐이다.


아빠를 증명한다는 것은 아빠의 삶이 다른 아빠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휴먼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도 아니고 장애 극복한 '영웅'도 아니다. 아빠의 증명이 그렇게 되는 순간 나는 아빠로서의 나를 포장한 것뿐이다. 나는 여전히 그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다.


나를 포함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역할은 자신의 삶이 보통의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곧 권리로 작동한다면 앞서 말한 '장애 정체성이고 나발이고'라고 하며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늘 고민이다.


나 또한 그 접근 방법을 고민하고 있지만 나 혼자만의 고민으로 접근하는 순간 또다시 비판으로만 끝나게 된다. 그 악순환을 아들과 아들이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접촉부터 시작해야겠다.


감사한 것은 아들과 함께 고민들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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