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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카눈넝 Oct 23. 2022

<4장> 1. 그대에게 ‘나마스테’

“읍!”하는 소리와 동시에 왼쪽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꼭 동작을 완성할 필요는 없어요~ 자기 몸이 허락해 주는 만큼 움직임을 가지시면 돼요."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을 훑었다. ‘뭐야, 다들 잘 해내고 있잖아?’ 몸에 무리가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한 욕심에 무리하게 동작했다. 그 결과 어깨가 다쳤고 한동안 요가를 쉬어야 했다. 요가에 불타오르는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한동안’은 가혹했다.     


‘요가’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들었던 것이 언제였을까? 최근 나의 관심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요가가 언제부터 내 삶에 등장했는지 궁금했다. 고등학교 시절 겨드랑이털을 밀지 않는, 자유롭고도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선생님이 계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인도 여행을 하고 요가를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요가란 범접할 수 없는 세계같이 느껴졌다. 성인이 된 후에 고등학교 친구가 가족과 함께 인도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친구는 요가 자격증을 땄다. 한국에 들어와 요가 강사로 일한다고 했을 때 나는 ‘오, 특이하네?’하고 넘겼었다. 그만큼 요가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나뿐만 아니라 십 년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마구잡이로 생겨나는 새로운 요가복 브랜드를 보면 사람들이 요가에 관심이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효리’ 영향이 아닐까?     


요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실제도 해본 적은 없었다. 첫째가 세 살이 되자 어린이집에 갔다. 나에게 오전만큼은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운동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출산 후 많이 달라진 내 몸뚱어리를 어떻게 좀 하고 싶었다. 집 앞 전봇대에 붙어있던 전단을 발견했다. 오픈 행사로 파격 할인을 한다는 뻔한 상술에 속는 셈 치고 갔다. 그곳은 헬스와 요가 수업을 모두 하는 곳이었다. GX 수업을 등록했는데, 요가와 필라테스 그리고 줌바 댄스 등 다양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주로 오전 수업은 요가로 이루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요가를 했다. 그전까지 태어나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요가라는 운동이 꽤 잘 맞았다. 일단 격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고 차분하게 시작하고 이완하는 동작으로 마무리를 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모든 요가 수업이 끝날 때 항상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하고 “나마스테” 하며 인사를 한다. 나마스테의 뜻은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한다.’ 하는 말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미워 헐뜯고 혐오가 도사리는 시대에 서로에게 이런 신성하고 아름다운 말을 건네다니. 요가의 매력에 빠져들며 약 육 개월을 열심히 매일 같이 다녔다. 그러다 뱃속에 둘째가 찾아왔고, 임산부의 몸으로 더 이상 요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뒤로 시간이 흘러 둘째도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다. 나에게 약 2년 만에 다시 ‘자유시간’이 생겼다. 둘째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우리는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한 번 맛본 요가를 잊을 수가 없어 주변에 있는 요가원을 물색했다. 괜찮은 요가원을 찾았는데 알고 보니 전에 다녔던 곳에서 수업했던 선생님이 새로 차린 요가원이었다. 신기한 것은 등록한 요가원의 다른 지점에서 앞서 말한 고등학교 친구가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요가 수업만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 과감하게 일 년을 등록했다. 앞으로 계속 요가를 하고자 하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요가를 시작했고 일주일 정도 다니니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니 제법 유연성이 생겨 몸이 가벼워졌다. 그 바람에 욕심을 부리다 어깨를 다쳤다. 찾아보니 요가를 하다가 다치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인 만큼 많은 사람에게 일어났다. 회복 시간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다니며 적절한 치료를 받았지만, 왼쪽 어깨는 여전히 아팠다. ‘이만큼 쉬었으면 괜찮겠지.’ 하고 들어간 수업에서 아픈 어깨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다른 곳에 무리하게 힘이 들어갔다. 마음먹고 일주일 정도 더 쉬어보았다. 일상생활에서 통증이 없어지자 조심스레 다시 요가원에 발을 들였다. 요가 선생님께 조언을 구해도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수요일 요가 수업은 항상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의 수업이기 때문이다. 아픈 어깨를 조심하며 수련을 하고 매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수업 중간에 어깨를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셨는지 나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걸었다. “혹시 어깨가 불편하세요?”

“네,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조금 아픈 것 같아요. 계속 더 쉬어야 할지 아니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요가를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해 주셨다. “다쳤다고 마냥 쉬다가 다시 요가를 하면 또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했어요. 그러다 보면 몸이 또 회복하면서 괜찮아졌어요.”

‘역시 잘 통할 것 같은 내 느낌이 맞았어!’ 듣고 싶었던 조언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 뒤로 요가를 하면서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모든 동작을 하지 않고 내 몸에 집중했다. 나의 몸의 허락해 주는 만큼 움직임을 가졌고 신기하게도 통증은 점차 사라졌다.     


모든 일에서도 매한가지인 것 같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범위의 일에서 넘쳐나면 결국 나에게 탈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나는 저만큼 멀리 가고 싶은데 당장 상황이 그렇지 못해 한 발짝밖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육아하다 보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나의 시간’이 적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육아와 가사에 발목 잡혀 있다는 우울한 기분이 어김없이 들이닥친다. 아마 대부분 엄마들이 이러한 기분에 힘들어할 것이다. 어느 순간 사라진 ‘나’. 그런데 이런 기분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모든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다. 괜스레 남편이 미워지고 아이들에게 신경질적인 엄마가 되어버린다. 현재에 항상 불만이 가득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나를 옥죈다는 느낌도 든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자주.     


‘인정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정.’ 상황은 언제나 변화하기에. 집에서 육아만 하다 보니 밖에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루빨리 사회 생활해서 남편에게 받는 생활비 말고 ‘나의 돈’으로 사고 싶은 것도 맘껏 사고 싶었다. 둘째가 돌이 지났을 무렵 고민 없이 어린이집을 보냈다. 첫째는 3살이 돼서야 어린이집에 갔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주변에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았고, 미술학원 강사 일을 했었다. 하지만 일 년 정도 지나자 더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둘째는 생각보다 자주 아팠고 코로나로 어린이집에 갈 수 없는 날들이 많아졌다. 가까이 계시는 시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으려 하다 내 몸만 축날 것 같았다. 

그래서 관뒀다. 하지만 마냥 슬퍼하지 않았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져 있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자주 그리지 못했던 그림을 더 연습했고 배우고 싶었던 수업을 다녔다. 그랬더니 일하기 전 무기력했던 나의 모습은 사라졌다. 일을 그만두면 집에서 무기력한 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홀로 설 수 있는 단단한 힘이 생겨있었다. 내가 지금 이것을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봤다. 주어진 상황이 오히려 나에게 또 다른 길을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계속 학원 일을 했다면 다른 일에 도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로 가거나, 길을 새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대에게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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