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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카눈넝 Oct 23. 2022

<4장>_5. 주유하는 여자

혼자서 운전하는 게 좋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듬뿍 담긴 노래를 틀어 놓고 목청껏 따라 불러도 누구 하나 듣는 이가 없다. 느낌에 흠뻑 취해 가수가 된 마냥 서글픈 표정으로 노래를 불러도 보는 이 하나 없다. 좋아하는 팝송을 내내 허밍 하다 후렴구만 불러도 놀리는 이도 없다.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들어도 괜찮다. 차만 타면 노래를 트는 나지만 집에서는 노래를 틀지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차 안에 들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비게이션을 위해 핸드폰을 연결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노래를 틀게 된다. 밖에서 나는 소리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안에서 나는 소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온전히 나 혼자만 있는 시간이다.     


첫째가 세 살쯤이었을 것이다. 육아로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출장을 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과 아이의 일로 말다툼했다. 아이의 울음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던 나는 아이에게 화풀이했고 그 모습을 본 남편이 화를 냈다. 엉엉 울어대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언성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남편의 목소리를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 순간을 차 키를 챙겨 박차고 나왔다. 아이를 두고 혼자서 뛰쳐나오는 상상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남편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현관문이 닫히기 전까지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 비좁은 문틈 사이로 삐져나와 나를 따라왔다. 무작정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집 출발했다. 아마 대부분 엄마가 그렇듯 막상 출발하니 갈 곳이 없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무작정 오늘 아침에도 다녀왔던 요가원으로 갔다. 요가원에 주차하면 오가는 사람이랑 마주칠 것 같아 그 옆 갓길에 주차했다. 기어를 P로 해놓은 동시에 턱 끝까지 차올랐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엉엉 소리를 내며 아이처럼 대성통곡했다. 큰 마음먹고 박차고 나와서 도착한 곳이 고작 집 앞에 있는 요가원이라니. 서러웠다. 불러낼 사람도 없고 카페에 가서 꺼이꺼이 울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 안에서 한참을 울다 다 쏟아져 나왔는지 눈물은 멈추고 조금씩 호흡이 느리게 돌아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잔잔한 노래를 틀었다. 언제 또 챙겨왔는지 가방 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 한 권이 있었다. 지금은 책의 제목조차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위로를 받으며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렸고 집에서 나온 지 한두 시간 정도 지난 후 아이와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날 이후부터였는지 나는 차 안이 좋다. 왠지 모르게 아늑하고 위로가 되는 공간이다. 아이 둘 다 어린이집에 가 있는 오전 시간에 혼자 자유롭게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는 일이 짜릿하다.     


 결혼 전에는 운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아이를 낳고 객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움직이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버스 노선도 잘 되어있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남편은 자주 집을 비웠기에 근처에 사시는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이라 일주일에 한 번은 문화센터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이조차 매번 시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은행에 가거나 간단한 일을 보러 다니고 싶은 경우는 더욱이 곤란했다. 결혼 전에는 완전한 독립형 인간이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동시에 바로 운전면허 학원으로 갔다.

면허가 생기고 차를 사게 되자 비로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차는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데려다줬다. 혼자의 힘으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나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이 크나큰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얼마 전 아이 둘을 데리고 홀로 친정을 갈 때도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오히려 신호등이나 구불구불 길을 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 쉬웠다. 주유도 혼자 하지 못해 남편에게 늘 부탁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주유구도 척척 잘 연다. 주유가 끝나는 소리에 기름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알뜰하게 넣는다. 멋지게 주유구 뚜껑을 따닥 소리가 날 때까지 돌려 잠근 후 이런 일쯤이야 별거 아니라는 듯 주유구 덮개까지 탁! 하고 닫으면 끝. 이제 남편에게 부탁했던 주유 심부름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했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혼자서 주유하고 운전을 한다는 것이 별일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겐 또 다른 도전이었고 그 도전으로 인해 자유를 성취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므로 나에게 더 다양한 기회가 열렸으며 자신감도 가져다주었다. 그만큼 만나는 사람도 많아졌으며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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