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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카눈넝 Oct 23. 2022

<5장>_2. 너는 자라나고 나는 익어간다

집이 코 앞인데 바지에 오줌을 쌌다. 금요일이라는 핑계로 아이들과 저녁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일찍이 저녁을 해결하니 기분이 좋아 평소에는 잘 사주지도 않는 맛난 간식도 먹었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와 어둑해진 거리에 따뜻한 노란 빛의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그랬던 순간에 “엄마! 나 바지에 쉬 했어….” 시무룩한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본인도 얼마나 놀랐을까 싶었다. 올해 세 살이 된 둘째이다. 기저귀는 이제 아기나 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팬티 입은 언니’가 되었다. “차가워~ 어떡해~”를 연신 외쳐대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겨우 집으로 들어 왔다. 현관에 잠시 서 있으라고 한 뒤 신발을 벗기고 그대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화장실 안에서 둘째는 스스로 축축하게 젖어버린 양말과 바지 그리고 속옷을 벗어 문 앞에 두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아이들에게 놀고 있으라고 나는 열심히 오줌에 젖은 신발을 세탁했다. 해맑은 얼굴로 마냥 신나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실수하고 자책하기는커녕 금방 잊어버리고 현재의 즐거움을 바라볼 줄 아는 아이. 욕조에 가득 찬 따뜻한 물만큼, 화장실을 가득 채운 온기만큼 내 마음도 따듯해졌다. 바지에 오줌 싼 것에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에는 잘해야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아이의 태도를 배워본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모든 것이 처음이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나라면, 첫째가 바지에 실수했다면 아이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첫째 아이는 단 한 번도 밖에서 바지에 오줌을 싸지 않았다. 과연 실수하지 않는 아이는 괜찮은 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실수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때의 나는 정말 지독하게도 냉정하고 작은 틈이라도 용납하지 못했다. 아이를 아이로서 바라보지 못하고 어른에게 바라야 할 것을 당당히 바랐다. 그런 영향을 받고 자라서인지 첫째 아이는 실수를 하면 마치 큰일이 벌어진 것처럼 두려워한다.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자신만 알았던, 아이의 마음을 배려해주지 못했던 이 못난 엄마의 탓이 크다. 첫째의 세 살은 다 컸다고 생각했다. 커 보여서 그만큼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 작고 어린아이에게 의지했다. 그래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꼭 혼자 하도록 했다. 둘째의 세 살은 마냥 아기 같다. 본인은 이제 언니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아주 어린 아기 같다. 혼자서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꾸만 “엄마가 해줄게.” 가 튀어나온다.


본인에게 엄격한 엄마가 동생에게는 관대한 모습이 얼마나 속상할지, 또 얼마나 억울할지 생각하면 손가락 끝부터 뼈가 아려온다. 미안한 마음에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이다. 우연히 우리에게 첫 번째로 찾아온 것뿐인데 짊어져야 할 짐이 컸다. 부족한 부모라서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다. 아마 둘째가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셋에서 그쳤더라면 첫째의 이 서러움을 몰랐을 것이다. 둘째를 키우면서 어린아이에게 참 많은 것을 원했다고 반성한다. 그래서 요즘은 더욱이 첫째의 마음을 헤아려 주려고 노력한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내 계획에 맞추려고 했다. 그러려면 모든 일을 빨리 끝내야 했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안돼.’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요즘은 위험하지 않은 일이라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잘 준비를 끝낸 후에 아이들이 식탁에 놓인 빵을 먹고 싶다고 한다. 나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본다. 빵을 먹고 나면 양치를 다시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잠자리에 눕는 시간이 뒤로 지체된다. 그래서 강하게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양치하고 나와서 고구마가 먹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다. 양치는 다시 하면 되고 오늘 좀 늦게 자면 좀 어때, 너희가 지금 먹고 싶은 것을 먹어 행복하면 좋지 한다.


어떤 이가 보면 그걸 왜 먹지 못하게 했어? 하며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잘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융통성이 없었다. 아이들이 하원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내가 생각했던 순서대로 아이들이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나 혼자 정해놓은 시간 안에 잠이 들어야 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했다.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날에는 아이에게 모든 짜증이 향했었다. 첫째 아이에게 얼마 전에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고 했던 내 모습이 생각이 난다. 왜 없긴, 없는 엄마 밑에서 자랐으니 그렇지.      

‘아이들에게 인상을 쓰고 있는 엄마로 기억이 남으면 어쩌지.’하며 걱정한다. 나는 따뜻하고 언제든지 웃는 얼굴을 가진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아니 그런 사람이고 싶다. 아이들에게만 아닌 모든 사람이 나와 있으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으면 좋겠다는, 어쩌면 ‘주제넘은’ 꿈을 가져 본다.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서 ‘그러는 척’ 행동했던 적이 있다. 여유 있는 척, 기다려주는 척,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척, 화를 참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척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척’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이 아니라 쉽게 잊어버리고 본래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면 결국 ‘척’을 하는 나는 나대로 힘들고 그러는 엄마의 모습에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한다.

못났던 엄마의 모습을 용서 구하고 싶다. 6년 전 잘 못 채운 첫 단추를 풀어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잘 채워나가고 싶다. 깊고 넓은 그릇을 가진 어른으로서 언제든지 내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엄마로서 그리고 든든한 아내로서 잘살아 보고 싶다. 작은 아이를 통해 나를 반성하고 배워간다.          


뱃속의 작은 콩이었던 아이는 점점 자라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던 나는,

부드럽게 또 진하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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