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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여행‘이라 쓰고 ’금쪽상담소‘라 읽는다.

치앙마이에서 생긴 일

by 안긁복의 모두극뽁 Feb 28. 2025

엄마와 치앙마이에서 3박 4일, 본격적인 여행 2일 차 아침이 밝았다. 그러고 보니 석사과정 중에 엄마랑 대만을 다녀온 뒤로 모녀 둘만의 여행은 10여 년 만이다. 엄마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결혼 이후로는 처음이려나. 오래간만인 만큼 이 여행을 특별한 시간으로 채워가고 싶었고, 또 절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알차게 세워둔 여행 계획(쿠킹클래스, 근교 고산지역 투어 등)은 100년 만의 홍수​가 무심하게도 깡그리 쓸어갔다. 낙담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는지 엄마는 관광지나 액티비티보다도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인 것 같은’ 로컬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름 내가 여기서 1주일이 넘게 있었으니 어떻게든 3일을 잘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하고 여유로운 사람들 틈에서 느린 호흡으로 엄마와 발맞춰 걸어보기로 했다.  


DAY 1


첫날 아침은 함께 요가를 했다. 올드타운 내에 있는 요가원들 중 ’ 나무로 지은 건물 2층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수련할 수 있다 ‘는 곳으로 골랐다. 아침 첫 수업에는 우리 모녀와 한국인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서양인들이었다(다들 요가고수였다). 이국적인 분위기 덕인지 평소와 달리 보다 깊은 수련을 이어갔다. 어떤 동작을 하든 무리하지 않게, 본인의 컨디션에 맞춰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쉬운 동작일지라도 “you got this!” 하고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강사님 덕분이기도 했다.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이는 강좌이기에 쉬운 영어로 진행되긴 했지만 엄마도 수업에 무리 없이 따라왔다.

올드타운의 freedom yoga studio

내가 놀란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늘 온몸이 뻣뻣하던 엄마가 빈야사 동작들을 무리 없이 다 해낸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수업이 끝나고 요가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엄마가 최근 은퇴 후 동네 문화센터에서 요가, 영어회화, 댄스, 명상 등등 여러 수업을 수강하시면서 그동안 배워보고 싶은 걸 다 배워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ㅇㅇ아, 너무 좋다. 오전 시간에 요가 다니고 줌바댄스 다니던 친구들 부러웠는데.” 했던 엄마였다. 영어 회화 선생님이 단어 몇 개로 자신 있게 말하는 건 당신이 일등이라고 했다며 들뜬 목소리로 자랑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인지 요가가 끝난 뒤 엄마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외국에서 진행되는 수업도 무리 없이 따라가고, 외국인과 스몰톡도 했으니 그간 배운 것들이 정말로 몸속에 쌓였음을 스스로 확인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엄마와의 요가 수련

수업을 마치고는 올드타운을 한 바퀴 산책했다. 엄마는 내가 생각 없이 지나쳤던 나무와 꽃들, 건물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이건 무슨 꽃 같다거나 이 건물 주인은 돈이 엄청 많은가 보다거나, 꼭 코멘트를 하나씩 달면서 마치 이 도시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아 가려는 듯 보였다.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서 관광지 하나 찍고 다시 버스에 타는 그런 패키지 여행보다 이렇게 도시를 걸어보면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진짜 여행 같다고도 했다. 내게는 익숙한 형태의 여행이었지만 패키지 여행이나 단체연수를 주로 다니던 엄마는 이런 여행이 거의 처음인지라 설레보였다. 엄마가 이런 걸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아무것도 한 건 없지만 왠지 뿌듯했다.

꽃만 보면 멈추고 별안간 남의 집 대문앞에서 사진 찍어달라던 엄마

그렇게 걷다가 이미 남편과 다녀왔기에 검증된 맛집 ‘블루누들’에 도착했다. 조식을 먹고 나오긴 했지만 요가와 산책으로 배가 꽤나 고픈 상황이었다. 지난번 방문 때는 웨이팅이 없었는데 이번엔 20여분 기다렸다가 먹게 되었다. 괜스레 이 집이 얼마나 유명한지, 얼마나 맛있는지, 미슐랭을 들먹여가며 엄마에게 긴 웨이팅의 필요를 설득했다. 갈비국수 두 그릇에 이번엔 비빔국수까지 시켜 나눠먹기로 했다. 다행히 엄마 입맛에도 맞았는지 우리는 국수 세 그릇을 다 비웠다.

웨이팅 끝에 먹은 블루누들, 기본 이상은 한다!

다음 코스는 머리를 길게 기른 예술가 포스의 사장님이 내려주는 커피가 무척 맛있다는 유명한 카페였다. 유명세 때문인지 카페 규모가 작기 때문인지 만석이었고 역시나 웨이팅이 있었다. 밥만 먹으면 일어나는 식당과는 달리 언제 일어설지 모르는 것이 카페이다 보니, 엄마는 카페에서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나는 너무 가고 싶었던 카페인 데다 동선상 이쪽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엄마의 불편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고 순서를 기다렸다. 그래서였을까 커피를 주문하고 카페 이곳저곳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긴 뒤 자리에 앉았더니 엄마가 한마디를 했다. “나는 뭐 어디서 유명하다는 데, 남들 다 가는 데 가는 거 말고 그냥 길 가다가 괜찮아 보이는 데 들어가 보는 게 진짜 여행이라고 생각해.” 만약 엄마가 그게 난 더 좋아,라고 했으면 그냥 아 그래?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근데 엄마의 그 말은 지금 우리의 여행을 ‘가짜 여행’으로 만들어버렸다. 바로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이게 ‘진짜여행’이라고 했으면서. 그것도 엄마와의 여행이라 일부러 실패가 없을만한 곳들만 골라 가고 있는 건데.


“아니 여기 커피가 진짜 맛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온 거야!” 내가 쏘아붙이자 엄마도 계속 뾰족한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막 그렇게 맛있지도 않아. 그리고 솔직히 이런 데 왔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온 거잖아. 너 너무 SNS에 자랑할만한 사진 올리고 과시하려는 마음 있는 것 같아.” sns에 사진을 올리고 때론 자랑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녔지만, 엄마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마음이 깊이 상해버리고 말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녔다. 이전에도 이런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어 엄마 아이디를 차단하기도 했다.

 

그냥 거기서 그쳤으면 될 일이었다. 친밀하고 오래된 관계일수록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이전에 거기’서 그랬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거기다 더해 애먼 사람까지 끌어들이면 화력은 배가 된다. 두 모녀는 ‘그때, 저 때, 그전 때’, 일어났던 일을 끄집어 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하고 싶은 말을 꺼내버렸다. “아니, ㅇㅇ(내 남편이자 엄마의 사위)이가 그러더라고. 네가 대기업 다니고 아기들 낳아서 기르는 친구들 부러워한다고. 근데 네가 그렇게 못하니까, 니 나름대로 좋은 카페 가고 여행 가는 거 올려서 결핍을 채우는 것 같다고. 여기 온 것도 도피 아냐? “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남편이 저렇게 말했을 리가 없거니와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비겁하게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 남편의 말로 나를 찌르다니. 게다가 내가 지금 가장 아픈 부분인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리면서.


도피해 온 것 맞지만, 막상 엄마가 그걸 집어내니 속상했다. 게다가 엄마는 내가 오랫동안 난임치료를 받고 인공수정과 시험관을 반복하면서 실패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부러 말하지 않은 것은 걱정하실 것 같기도 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이가 생겼다고 기쁘게 임밍아웃 해드리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엄마는 요즘 만날 때마다 왜 노력을 안 하냐며, 왜 자꾸 살이 찌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그동안 품어왔던 설움과 미움이 복받쳤다. 말을 꺼내지 않고는 감정이 부풀어서 몸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도피 맞아! 나 노력했어! 했다고! 시험관까지 여러 차례 했는데 안 됐어. 그리고 살은 다낭성 증후군이 있어서 살이 쉽게 찌고 잘 안 빠진대. 시험관할 때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몸이 붓고 살이 찐다고!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놀라서 아무 말하지 못하는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인 걸 보고도 나는 끝까지 갔다. “엄마는 언제까지 내가 엄마 맘에 들어야 만족해? 내가 좋은 대학을 나오고 박사까지 하고, 결혼도 하고 잘 사는데! 살쪘다고 아이 못 낳는다고 그런 걸로까지 계속 구박을 해야겠어 이 나이 먹도록? 나는 언제까지 엄마 기준에 맞게 살아야 돼?”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 엄마 정말 몰랐어.. 왜 말 안했어…” 하고 엄마가 나를 꼭 안아줬다. 카페에 우리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일까? 우리는 3n년간 꺼내지 않았던 마음속 이야기를 다 했다. 때론 엉엉 울면서 때론 한숨 쉬면서, 때론 서로를 토닥이면서. 엄마는 먼저 전화 한 번 없는 무심한 딸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고, 나는 전화를 걸거나 만날 때마다 싫은 소리를 듣는 게 힘들어 거리를 뒀다고 무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늘어놓았다. 나는 엄마가 막내딸이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도 응석받이이고, 본인이 불편하거나 싫으면 그걸 다 티 내야 되는 이기적인 면모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그 사건’을 들먹이면서. “엄마 그때 생신 때 오마카세 모시고 갔는데, 기분 좀 나쁘다고 젓가락 딱 내려놓고 분위기 싸해졌잖아. 오늘도 그래. 엄마 맛있는 커피 맛 보여주고 싶어서 기껏 왔는데 엄마 기분 좀 상했다고 그냥 맛 별로라고 말해버리잖아. “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며 엄마는 자신의 솔직함이나 감정에 따른 행동이 내게 상처였는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인기 많은 카페에서(그것도 사장님을 마주한 커피바 바로 앞자리에서) 언성을 높이고 울다가 부둥켜안다 하는 이방인 모녀는 얼마나 이상한 풍경이었으며 또 민폐였을까. 그런데 그땐 체면이고 염치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언젠가는 꼭 지나갔어야 할 일이었다. 어찌 됐건 우리는 두 시간 만에 그 카페에서 일어섰다. 여행 첫날의 반나절이 그렇게 지나갔다.

커피맛은 기억 안나지만 진짜 맛있고 트렌디한 카페로 유명한 Twenty Mar

저녁엔 예약되어 있던 미슐랭 레스토랑에 갔다. 진짜로 맛도 있었지만 엄마는 아까의 대화를 의식한 듯 몇 번이고 말했다. “와 진짜 맛있다. 이런 데 데려와줘서 고마워. 딸 덕분에 치앙마이까지 와서 미슐랭도 다 와보고. 호강한다!” 상처받았을 딸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그러기 위해 스스로 달라지려는 엄마가 고마웠다.

화해의 저녁식사. 미슐랭 스타 받은 메뉴는 훌륭했다.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다시 일상 대화를 나누던 중 엄마가 “요즘엔 주말에는 아무 말도 안 할 때도 있어. 전화도 안 오고 그러면 진짜 목소리를 내보지도 않는다니까?”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치 누가 내 뒤통수를 내리친 것 마냥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이 주륵 흘러 내렸다. 나는 내 아픔만 생각하고 듣기 싫은 소리 안 듣겠다고 엄마의 외로움은 외면했다. 퇴직 후의 허전함이나 고립감, 품 안의 자식들이 독립해 떠나버린 데에서 오는 상실감 따위는 씩씩한 우리 엄마에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해~ 사위 목소리를 더 많이 듣는다.”라는 말에 숨겨진 엄마의 우울과 허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가 맨날 나 구박하니까 내가 엄마한테 전화도 안 하고 엄마 집 가기도 싫지.”라고 이야기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나를 엄마 기억 속에서 삭제해버리고 싶었다.


이번엔 내가 미안하다고 이야기할 차례였다. 우리 둘은 오늘 서로에게 아주 많이 미안해했다.


DAY 2


둘째 날 기억에 남는 것은 엄마가 호텔의 작은 수영장에서 수영하며 기뻐했던 것, 어제와는 달리 내가 소개한 카페에서 내가 주문해 준 ‘더티카페’를 너무 맛있어하며 드셨던 것, 그리고 함께 사원투어에 가서 금빛으로 둘러싼 탑을 돌며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엄마 뭐라고 빌었어? 할머니 되게 해달라고 빌었지?”라고 물은 내 질문에 대한 엄마의 답이 “우리 딸이 더는 상처받지 않게 해 주세요.”였다는 것도.

호텔 수영장에서 아이처럼 좋아하던 엄마
엄마도 너무 좋아했던 ‘아카아마’의 더티커피와 당근케이크
치앙마이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 ‘도이수텝’ / 급탑을 3바퀴 돌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DAY 3


셋째 날. 아직 홍수 복구가 되지 않아 원래의 내 숙소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새로운 집을 급하게 구해야만 했다. 에어비앤비 어플을 뒤지고 뒤져 그래도 깨끗하고 안전해 보이는 아파트를 구했다. 엄마와 함께 짐을 옮겼다. 아파트 자체는 안전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구석지인 데다 길이 울퉁불퉁해 무거운 캐리어를 끙끙거리며 끌고 가느라 온몸이 땀에 젖었다.

새로 구한 숙소로 가는 길/ 낡은 아파트지만 리모델링을 해 깨끗했다

이사만으로 마지막 날을 보낼 순 없었다. 아무 데도 안 가도 괜찮다는 엄마의 손을 끌어 ‘치앙마이 대학교’ 안에 있는 저수지에 갔다. 일몰 시간에 환상적이고 큰 저수지를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을 좋아하는 엄마와 마지막 시간을 꼭 거기서 보내고 싶었다.

치앙마이 대학에 있는 앙깨우 저수지 / 일몰의 반영이 멋지기로 유명하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돌고 우리는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또 대화를 오래 나눴다.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뒀는데 돌아와서 보니 엄마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여기 남을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너 캐리어 너무 무겁더라. 그거 혼자 끌고 또 가야 되지? 나한테 좀 덜어줘, 내가 한국으로 먼저 가져갈게.”, “홍수 복구 언제 된대? 그 집이 안전하고 좋아 보이던데 거기로 얼른 가면 좋겠다. 아까 그 집은 너무 컴컴한 길 지나가야 되더라.”

저수지 근처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 나눈 우리

떠나기 전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 진짜 좋았어. 다른 것보다 너랑 이야기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리고 여행 온 사람 아니고 여기 사는 사람처럼 대학교 안에도 가보고, 주민들처럼 공원 산책도 하고. 이런 여행 처음이라 행복했어. 진짜야.”


공항으로 엄마를 보내드리고 나니,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함과 무슨 일이 생겨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또 돌아갔다는 허전함이 몰려와 나는 또 엉엉 울었다. 흔한 말이지만 엄마도 엄마가 처음일 텐데, 나 역시 ‘엄마’ 역할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엄마한테 들이밀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내가 도달할 엄마의 시간. 그때의 나는 지금 우리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를 모른다.
이 세상에 엄마를 아는 딸이 있는가.
없다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나는 한 번도 엄마를 이해하고 알아준 날이 없었다.
엄마의 우울, 엄마의 외로움, 엄마의 허기를 알지 못했다.

엄마와 딸 사이는 간단한 관계가 아니다.
미워하고 사랑하고, 창피해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아픈 곳을 할퀴고 무자비하게 상처를 주고,
다시 그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빌고 미안해하고,
울고불고 통곡도 마다하지 않는다.
눈물이야말로 엄마와 딸 사이에
핏빛으로 흐르는 강물이다.
격렬하게 분노하고 격렬하게 싸우고,
그리고 격렬하게 몸을 다 바쳐 사랑한다.

(신달자,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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