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항암 후 다행히 열이 나지 않았던 정음은 대신 거의 매일 외래를 오고 가며 적혈구와 혈소판 수혈과 수치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는 '이사'를 했다. 친정부모님이 '대신' 이사를 해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무튼 우당탕탕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마쳤고 잠시 친정에 거주하며 병원을 왕래하던 나와 정음은 다시 동네로 입성. 5월 초에 정음의 급한 수두증 및 개두술 이후 내내 병원에 입퇴원을 거듭하며 잠시 떨어져 있다가 그렇게 네 식구는 두 달 만에 다시 모였다.
두 달 만에 쌍둥이 중 '첫째'와 제대로 만났다. 훈민은 어느새 부쩍 자란 모습. 두 달 만에 본 아이를 나도 모르게 와락 껴 앉았을 때. 아이는 약간 수줍어했지만 그렇게 품에 들어와 안겼다. 이상하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를 뻔해서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신없이 모자 상봉을 한 이후 아직 전쟁터(?)처럼 정리 안 된 이삿짐을 부랴부랴 치우며 나름의 살림 신공 발휘하여 정리를 했다. 휴 하는 한숨을 내 쉴 틈도 없이.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긴 후. 그야말로 정신력과 지침 없는 막일(?)의 승리랄까...
집에 있던 책을 '모조리' 버렸다. 정말이지 몇 백권 정도 되는 책을 싹 빼 버렸다. 그토록 좋아했던 책이었지만. 인생은 이렇게 송두리째 변할 수 있다. 책을 읽고 쓰기 위했던 지난 과거 시절을 모두 후회하는 나는... 그 시간에 정음이를 한번 더 관찰하고 살피면서 너에게 사랑을 쏟아 주었으면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의 가책이 여전하다. 그리하여 나는 책을 보기 싫어졌던 것일지 모른다. 싹 버리고 남은 몇 권의 정말 버릴 수 없었던 책들만을 남겨둔 채. 내가 썼던 졸작도 모조리 버렸다.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아이 공부방으로 만든 방은 처음엔 초토화된 곳이나 다름없었지만 버리고 닦고 치우고 정리하니 나름 모양새가 갖춰졌다. 그 후, 나는 첫째의 필통과 책가방을 살펴보았다. 엄마의 손이 타지 않은 채 내내 혼자 생활하고 버텨주느라 고생하던 흔적이 보였다. 몽당연필이 되어 버린 채 너저분해진 연필들, 헌 지우개들이 가득한 지저분한 아이의 필통. 눈물이 한번 더 왈칵 쏟아질 뻔했다. 아이의 연필을 새로 깎아주고 지우개와 자를 준비하고, 포스티잇에 아이에게 편지를 써넣었다. 몇 달 동안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서도 내색 한번 하지 않아 준 고마운 첫째... 아이에게 뭐라도 편지로 진심을 전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상과 책장, 그리고 네 필통을 정리하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모자란 어미어서 미안해....
1분 차이지만 쌍둥이 형제인 두 사람이 다시 같이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이번엔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계속 흘러넘쳤다. 아이들은 다행히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그 순간의 감정이란. 적절한 낱말을 찾지 못한 채 중첩되는 여러 마음을 품으며, 단 하나의 단어만이 그저 마음 심연 저 깊은 곳에서부터 목울대에 퍼지는 뜨거운 울컥함과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동시에 선명히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두 아이의 예전처럼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대화를 하고 눈을 마주친다. 비록 한 사람은 잘 걷지도 못하고 가려야 할 음식과 기타 여러 생활전선의 주의사항이 넘쳐흐르는 고난도 인생을 맞이했지만. 그럼에도 두 아이는 두 달 전처럼 '다시' 말하고 웃고 떠든다. 조잘대는 아이들의 목소리. 다시 '함께'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지루하다 말할 수 있을 그 순간이. 이제 나와 정음에게는 북받칠정도로 '간절' 하게 그리운 순간이 되었다. 이토록 평범함을 바라는 간절함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정말 모를 테다...
쌍둥이는 함께여야 제맛(?) 이지... 너희 둘이 함꼐 있는 걸 지켜보면서. 정말 내내 울었다....
새 집에서 고작 하루였지만. 정음이는 행복해 보였다. 실제로 정음이는 그랬었다. 병원에서는 '엄마 난 행복한 적이 별로 없어'라고 했던 아이였지만 어제 넌지시 자기 전 물었을 때 아이는 말해 주었으니까.
집에 다시 와서 좋아.
정음아 행복해?
응... 오늘은 좀 그래
정말 다행이다.. 고마워... 고마워...
우리는 오늘, 다시 입원을 했다. 내일부터 있을 조혈모 채집을 위해서다. 정음은 조혈모 세포이식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수치가 좋았을 때 자기 몸 안의 건강한 조혈모를 최대한 채집해 두어야 한다. 자가 이식을 해야 하는 정음의 수치와 내일부터 시작될 채집. 부디 큰 이벤트 없이 무탈히 이 과정 또한 잘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또 입원을 해야 하기에 정음은 결국 병원행 차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또 금세 오자마자 CT 찍고 적혈구 수혈을 받고 수치 주사받고 그러다 보니 이젠 제법 익숙채 졌는지 병동 생활에 다시 적응하며 저녁도 소량이지만 나름 잘 먹어 주었다.. 이런 모든 순간들. 우리에게 평범하게 되어 가는 중인 '병원' 생활이지만 그럼에도 정음과 나는 바란다.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평범한 순간들을 아주 간절하게.
다시 아무렇지 않게 시작된 입원- 이젠 익숙하지 정음아. 고마워..
두 아이의 엄마로서 나는 지난 몇 년을 뼈 아프게 후회한다. 여전히 자책이 없어진 건 아니다. 책을 덜 읽고 너희를 더 봤더라면. 글을 덜 쓸 생각을 하고 너를 세심하게 지켜봤다면. 커리어나 재테크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만을 위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변하진 않았을 것 같아서.... 그리하여 여전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자주 혼자서 몰래 눈물을 쏟아낸다. 후회해 봤자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지만. 눈물은 속죄하듯 계속 흘러넘친다. 언제쯤 마를까 싶을 정도로.
다만 눈물이 많아지는 만큼 동시에 어떤 단단함도 아주 조금씩 느리지만 생겨나는 중인 것만 같다. 한껏 혼자 울고 난 이후에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정음이 곁을 지키는 일. 비록 제대로 된 살핌과 양육을 해주지 못해서 내내 노심초사 미안해도 매일 첫째 훈민이에게 건네는 아침 문장과 안부 전화. 랜선으로 챙기는 여러 학교와 학원의 소소한 챙김들. 무슨 일은 없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그런 것들을 묻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그럼에도 '엄마' 로서 이제라도 좀 더 제대로 챙겨야 할 것 같아서.... 아니. 어쩌면 평범한 예전 순간을 복기하고 다시 회복시키듯 다시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이끄는 행동들일 지 모른다.
정음의 잃어버리고 빼앗긴 평범함을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훈민의 보살핌이 부재가 된 어린 나이의 고독함과 묘한 외로움에서 너를 다시 지켜낼 수만 있다면. 나의 두 사람. 이 두 아이를 위해 이제 나는 아마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마음과 달리 실천은 여전히 부족하고 또 모자란 어미이지만.
너희들이 내내 안온하고 편안할 수만 있다면.
더 크게 아프지 않고 이대로 무탈히 천천히 확실히 회복될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이 다시 형제로 뭉쳐서 산책을 나가고 게임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그 모든 예전의 평범한 순간들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내 이번 생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