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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 전날의 1+1 햄버거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by 컴쟁이

챗지피티 없이 긴 글을 적어 내려 가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엔 약간의 죄책감이었다. 인간의 문장이 아니라는, 그 얄팍한 자존심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지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속도도, 문장력도, 구성력도, 나보다 낫다. 그래서 쓰기도 전에 기가 죽는다.

기가 죽으면 사람이 조용해진다. 조용해지면 기록이 끊긴다.



오늘은 건강검진 날이다.

금식이 시작되기 전, 마음의 방점을 찍듯 뭔가를 먹어야 한다.

어제는 햄버거가 1+1이었고,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은 없었지만 핑계는 있었다. 햄버거가 1+1이니까요.

먹는 도중에 별안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뭐 해, 바빠?”

“햄버거 먹는 중”

“남편이랑?”

“ㅇㅇ”

“야채 같은 거 좀 챙겨 먹어”

“젊을 때 햄버거 먹지 언제 먹어”

“그건 맞지. 쉬어”


늘 그렇듯 모녀의 통화는 1분 컷.

때론 살가운 딸이 되어보겠다고 애교를 부려본 적도 있고,

존댓말을 연습하듯 써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싸가지가 바가지인 둘째딸이 되어 있다.

감쪽같이 사라지는 쌍꺼풀처럼.

성격도, 말투도, 결국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는 힘이 강하다.


요즘은 이것저것 많이 먹고, 그만큼 움직이지 않아서 살이 쪘다.

겉보기엔 그리 다르지 않지만, 체지방량이 늘었다.

작고 단단하다는 나의 타이틀은, 이제 헬스장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친구에게 넘겨야 할 것 같다.

어제는 영양제를 40만 원어치나 질렀다.

임신·출산 바우처가 남았는데, 뭘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임신준비 영양제를 구비하기로 했다.


올해 초 유산을 겪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작년 여름, 우울증과 같은 늪에 허우적댔던 탓에, 유산은 오히려 금방 추스를 수 있었다.

어쩌면 감정이 마모된 상태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 일을 농담으로도 말할 수 있을 만큼 괜찮다. 염려는 접어두셔도 된다.

그때 처음 알았다.

지나간 고통이, 현재의 문제에 가장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마치 “내가 이만큼 아팠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냐” 하고 내 안의 내가 말을 건넨 것처럼.


결혼 후, 많은 게 바뀌었지만, 많은 건 그대로다.

평일 한낮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흥미로운 이슈를 블로그에 올리고,

조회수가 잘 나오면 기뻐하고, 또 그다음 타깃을 찾는다.

블로그 렉카처럼, 하이에나처럼, 때론 연구자처럼.

내 마음을 잘 돌보고, 기분을 잘 관리하면 세상은 꽤 만만한 곳이 된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은 아마 훗날, 다시 세상이 어려워졌을 때 읽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내가 내게 건네는 메모.

무너지고 싶을 때 다시 읽으라고, 그때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내가 적는다.


건강검진은 무사히 마쳤고, 이젠 뭘 먹을까 고민 중이다.

오후 8시부터 금식이였어서 배가 고프다.

날이 더우니 판모밀도 괜찮고,

든든한 국밥도 나쁘지 않다. 이열치열이니까.

부디 건강에 이상이 없어서

앞으로도 햄버거, 메밀국수, 국밥 모두

마음 가는 대로 가릴 것 없이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p.s. 이 글도 챗 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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