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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Sep 15. 2023

리코더 합주

시작의 순간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리코더라는 악기를 만났다. 악기라는 것을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온 몸에 진땀이 날 정도로 리코더가 어려웠다. 선생님이 연주 방법을 알려줬지만 도무지 좋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도 불어보고 저렇게도 불어보는데, 삑삑거리는 소리만 날 뿐 도무지 우아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앞마당에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생님은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제대로 연습해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그러나 마루에 앉아 아무리 불어봐도 선생님과 같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을 삐빅거리다가 겨우 된 것 같아 다시 해 보면 여전히 안 되어 있고, 또 된 것 같아 자전거 한 바퀴 돌고 와서 다시 불면 또 이상한 소리만 삐빅거렸다. 결국 벌러덩 누워버렸다. 


 시골집 마루에 누우면 하늘이 보인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그림처럼 떠 있고, 살랑이는 바람이 머릿결을 헝클인다. 어느덧 해가 마루까지 들어와 몸의 절반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스르르 잠까지 온다. 얼마간 잠이 들었을까, 덜커덕 소리가 나서 살며시 눈을 뜨면 밭에서 저녁거리를 뜯어온 엄마의 무뚝뚝한 얼굴이 보인다. 엄마는 마루 밑 신발을 한쪽으로 정리해두고 들어가서 자라고 소리치신다. 잠을 깨워 방으로 들여보내겠다는 마음으로 소리치셨겠지만, 어린 내게는 괜히 화내는 엄마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들어가서 잘 수는 없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라도 제대로 소리를 내야, 친구들 앞에서 덜 창피할 테니 말이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리코더를 제대로 불고 싶다거나, 선생님께 잘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보다는 친구들이 못한다고 야유라도 보낼까봐 걱정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불기 시작했다. 삐빅, 빅 하다가 도레미파솔까지는 소리가 꽤 괜찮았다. 그런데 숨을 한 번 살짝 쉬고 다시 부는 데, 소위 삑사리가 났다. 리코더 몸을 통과하는 공기가 균일하게 나가며 우아한 '라'를 표현해야 하는데, 순간의 숨이 세게 통과했는지 경망스럽고 시끄러운 '라'가 되었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 없이 짜증을 내며 불고 또 불었다. 그때 부엌에서 나온 엄마가 '줘봐' 하더니, 순식간에 리코더를 가로 채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우아하게 불어버렸다. 선생님이 불었던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이럴 수가! 엄마는 리코더를 불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잘못된 생각을 보란 듯이 누르며 너무 잘 불어버렸다. 심지어 엄마는 '학교종이'부터 '아리랑'까지 능수능란하게 연주했다. 10살의 나는 그런 엄마에게 감탄하며 어느새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물었다. 대체 엄마는 언제부터 리코더를 잘 연주했냐고, 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었냐고, 나는 누구를 닮아 리코더를 못 부는 것이냐고!     

 엄마는 푸성귀를 뜯느라 연두색으로 물든 손톱으로 리코더 구멍을 열었다 닫았다를 능수능란하게 하다가, 연습하면 된다며, 해지기 전에 얼른 연습하라며 부엌으로 가버리셨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해가 지면 마을 전체가 조용해지고, 어느 순간 불이 다 꺼진다. 모두들 한낮의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눕혀 tv를 보다가 잠이 드는 것이다. 동네 주민의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라, 초저녁부터 주무시는 경우가 많다. 감히 삐빅거리는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숨을 몰아쉬고,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성공하겠다는 마음으로 리코더 구멍을 막았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결국, 나는 그날 해가 지기 직전 그러니까 엄마가 저녁 밥상을 들고 마루로 왔을 즈음 우아한 도레미파솔라시도 소리 내기에 성공했다. 성공하고 엄마의 눈과 마주쳤을 때, 엄마의 눈이 환호하고 있었다. 시작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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