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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Mar 26. 2024

'자기 홍보'는 미덕

나를 세일즈 하는 것은 결국 나


"네가 한 일을 좀 더 주변에 먼저 알리는 것이 어때? 물론 네가 마케팅 직원은 아니지만 연구원에게도 홍보력은 어느 정도 필요해..."


미국으로 이직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매니저와 면담시간에 들은 피드백이었다. 나는 문화 충격에 빠졌다. 신입도 아니고 한국에서 중간 관리자까지 경험한 수석 엔지니어였던 내가 이런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에. 한국에서 쌓은 11년의 경력이란 언어 장벽과 조직 문화의 차이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할 뿐이었다. 이후 나는 미국 회사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알을 깨고 나올 정도의 부단한 노력을 쏟았다.




미국에 근무 중인 한인들의 경험담을 읽다 보면, 미국 회사에서는 자기 홍보(Self-Promotion)에 능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보곤 한다. 내가 나, 내가 한 일을 세일즈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미국 이직자들이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그래 미국 문화에 맞게 이제부터는 나도 좀 나대고 나서보자'라고 결심하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잘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자기 홍보'다. 스스로를 홍보하라니 '왠지 그래도 되나' 싶어 주저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주입식으로 교육받고, 사회에서는 위계에 기반한 조직 문화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버려, 생각보다 체질 개선이 쉽지 않은 탓이다.


겸손, 겸양, 중용이라는 구태한 유교 문화 때문에 한국에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그다지 미덕이 아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왠지 집단에서 튀는 행동은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만 같다. 조직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이기주의자로 비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도 시대와 세대를 교체해 가며 조직 문화의 반전을 꾀하고 있지만, '위계'에 기반한 질서가 어지간해서는 깨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기업 문화를 지탱해 온 이런 위계 조직에 장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상하 관계가 명확하고, 중앙 집권적인 의사 결정 방식에 따라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 각 계층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역할과 권한의 범위가 명확해, 조직 내 혼란과 불확실성도 줄어든다.


하지만 위계 조직은 태생적으로 개인을 통제하고 자율성을 제한하다 보니 그 부작용도 못지않다. 의사 결정이 지연되고, 혁신과 창의성은 저하되며, 직급 간 갈등도 심화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직원들을 보수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이 위에서 내려온 '지시 사항'에 계속 묵살당하다 보면, 처음엔 의욕적으로 업무에 임하던 직원들도 결국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매사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 점차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주어진 일'만 하게 되고, 업무 진행은 묻기 전까지 공유하지 않으며, 심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된다. 내 안의 방어 기제가 동작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중꺾마라더니,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내 소중한 '상처받지 않을 마음'인 것이다. 이는 자율성을 거세당하면서 책임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를 보수화시키는 것은 엔지니어 본인의 경력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조직 문화에 도전할 필요는 없다. 조직 내 자신의 반경을 넓히는 것을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특히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논리적 사고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마저 퇴보하게 된다. 특히 향후 글로벌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스킬 셋을 연마중이라면, 평소부터 '자기 홍보'에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성과와 업적은 '먼저' 공유해야 유의미


지시받은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한 일이든 '결과'가 나오면 무조건 팀과 먼저 공유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결과의 '중요도'가 아니라 공유하는 '시기'에 있다. 정기적으로 갖는 주간 회의 때 의례적으로 하는 '보고'는 단지 디폴트일 뿐이다. 1주일이라는 주기동안 팀 구성원 누구나 자신의 일에 진척사항이 존재한다. 이를 같은 시기에 같은 모습으로 언급하는 것에는 어떠한 특별함도 없다.


그보다 짧은 간격(예. 2-3일)이라도 '먼저' 팀과 자신의 '결과'를 공유할 때, 그것이 특별한 '성과'가 된다. 이는 '튀는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모습이다. 특히,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개선점을 부각함으로써 자신의 역량과 성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짧은 간격으로 성과를 공유하면 팀 전체에서 내 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일과 팀원들의 업무 간 동기화 빈도가 높아져, 주간 보고 시 소통도 원활해진다. 또한 잦은 동기화로 팀원, 상사의 피드백을 더 빨리 받아볼 수 있고, 혹시나 일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 조기에 바로잡을 수도 있다.


반드시 구두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결과가 도출될 때마다 텍스트로 정리해 팀 전체메일로, 팀 공유 저장소나 게시판에 문서화 후 링크를 공유하면 된다. 실험 결과라면 데이터, 그래프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해 공유하면, 자신의 업무와 연관 있거나 관심이 있는 팀원들은 답장을 보내기 마련이다. 의견과 질문을 받으며 메일 쓰레드가 이어지면, 해당 주제에 대해 온라인 토론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본인의 주목도도 높아진다.


2-3일의 짧은 간격으로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이때는 '개발 중' '디버깅 중' 등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내용을 짧게 정리해 '상사'에게만 메일로 보내면 된다. 팀장은 묻기 전에 진행 사항을 알려주는 팀원에게 고마워한다 (내색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을 알아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한 피드백이 있으면 건설적인 메일로 답장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의 '중요도'가 아니라 '시의성'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본인이 먼저 개시를 했을 때 가장 의미가 있다.

나를 잘 파는 것도 엔지니어의 필수 능력.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발표는 의무가 아니라 홍보의 기회


진척 사항을 자주 공유하다 보면 이를 정리해 팀원이나 유관 부서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할 것을 부탁(또는 지시) 받곤 한다. 메일을 통해 자신의 성과를 공유하는 것보다 자신의 반경을 넓힐 수 있는 것이 바로 발표다.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시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 글에서도 말했지만, 발표는 의무가 아니라 자신을 알리는 더할 수 없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통상 업무 공유는 팀 내에서만 벌어지지만, 발표는 연관 있는 타부서원들, 조직장, 나아가 임원까지도 초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발표 자료 작성은 시간이 요구된다. 기존 업무 외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에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다. 성과를 자주 공유하는 것의 장점은, 이런 발표 자료 작성에 대한 시간을 보장받는 것이다. 발표의 '당위성'을 부여받기 때문에 업무가 되고 공식 업무 시간에 진행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비정기적인 '기술 발표'때문에 기존의 일의 스케줄이 변경될 여지는 크지 않다. 따라서 자료 작성에 무조건 너무 많은 시간을 쏟기보다 그 중요도에 따라 적절히 수위와 분량을 조정해 들어갈 품을 조절할 필요는 있다. 중요한 것은 적은 노력을 들이되 자주 발표 기회를 갖는 것이다.


기록의 습관화


조직 문화가 나에게 입틀막을 시전 할 수 있어도, 내 생각까지 앗아가지는 못한다. 비록 위로부터 내려온 '의사 결정'에 내 아이디어가 묵살될지라도 생각을 멈출 필요는 없다. 대신 이를 짧게라도 기록하라. 사내 개인 블로그, 팀 페이지, 연구 노트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저장소에 차곡차곡 아이디어나 생각을 쌓아 놓으면 언젠가 다시 꺼내 쓸 수 있다.


아이디어가 조직의 대의에 밀려 반려되는 경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기술적, 논리적 근거가 타당하다 해도, 조직이 생각하는 우선순위, 시의성, 또는 심지어 임원이나 상사의 잘못된 의지때문에 반려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 트렌드, 경쟁사 제품 발표, 조직 개편 등에 따라 언제든 상황은 변한다. 내 경험, 나만의 논리에 비춰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생각이라면 시간이 흘러 언젠가 다시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디어들이 전혀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생각을 정리해 기록'하는 과정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미국 회사에서는 입틀막 문화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것에 모두 익숙하다. 향후 글로벌 엔지니어가 되어 이런 조직문화에 노출되었을 때, 마음껏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글로벌 엔지니어를 꿈꾸는 우리는 조직 문화에 무릎꿇은 것에 좌절할 필요 없다. 쓸데없이 감정을 소모하지 말고 기록하라. 여기서야 말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고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목표와 성장 의지


연초 목표 설정 시기, 온라인 시스템에 연간 계획을 입력할 때 다소 곤란한 항목이 바로 '커리어 향상, 역량 강화 계획'이다. 평소에 본인의 미래 커리어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놓지 않기 때문에, 막상 무엇을 입력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단지 주어진 시간이 흐르면 다음 직급으로 진급하고, 뭐 잘 풀리면 팀장이 되고, 그 뒤로 더 잘 풀리면 임원도 되겠지 정도의 막연한 생각뿐인 것이다.


우리 엔지니어 스스로 커리어 성장을 '사내에서의 승급'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사내 승진뿐만 아니라 업계에서의 이직, 그리고 글로벌 엔지니어로 성장하기 위한 단계별 로드맵을 염두에 두자. 내가 현재 가진 스킬 셋, 역량을 바탕으로 향후 목표로 하는 지향점에 대해 대략적인 시계열상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역량 강화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인 목표를 현 조직상에서의 목표로 치환한다 (당연히 몇 년 뒤 이직, 해외 진출 같은 계획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에서 성장하고 싶은 자신의 의지를 평소에 팀 내에 드러낼 필요가 있다. 미팅이나 상사와의 면담시간, 특히 연초 목표 설정 시기에, 자신의 커리어 개선에 대한 생각을 팀원이나 상사와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동료들은 피드백을 줄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발전 방향을 확인할 수도 있다.


경쟁자, 팀원들의 견제가 두렵다고 이를 숨길 필요는 없다. 주위의 견제는 그 의지가 정치적인 면모를 보일 때 나타난다. 기술, 스킬 셋,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습득하고자 하는 의지, 배우려는 자세 등은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일이다.


목표대로 달성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조직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해외 출장', '기술 주재원' 등 커리어 향상을 위한 새로운 경험의 기회는, 평소 성장 의지를 드러내는 자에게 한 번이라도 더 가게 마련이다.


기술 블로그, 깃허브, 오픈 소스..


엔지니어 특히 CS배경의 개발자라면 회사 외부에 나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코딩 역량이 쌓였다면, 기술 블로그를 운영하거나 깃허브(github) 계정을 등록하고 오픈 소스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업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다만, 이는 업무외적인 시간을 투자해야 하므로 많은 의지가 필요하다. 또한 업무상 보안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기술 노출에 조심할 필요는 있다. 사내에 블로그 시스템이 있다면 여기에 운영해 사내에 국한해 기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만일 오픈 소스 활동이 사내 공식적인 업무와 연계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라. 해외의 엔지니어와 소통할 수 있고, 본인 개인 이력에도 큰 도움이 된다.




보수화된 한국 경력자가 미국 회사에 적응하기 힘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자율성,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조직 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무자들에게 권리와 책임이 상당 부분 이양되고, 실무자 간 격론을 통해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역할 조직 특유의 문화에 낯설수밖에 없다. 따라서 글로벌 엔지니어를 지향하는 우리들은 미리부터 이러한 업무 처리 방식을 익혀두어야 한다.


이제는 시대와 세대가 바뀌어 간다. 한국이 아무리 위계 조직 문화가 공고하더라도, 그렇게 좋아하시고 강조하시는 '혁신'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직원의 자율성을 높이는 문화로 변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성원의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높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 비단 글로벌 엔지니어로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이제 우리 엔지니어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미래에는 이러한 개인의 커리어 성장이 곧 조직의 이익과 중첩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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