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김치냉장고를 정리하다가, 작년 겨울 엄마가 담가주신 동치미를 발견하였다.
두 통 중 조각무가 담긴 것은 다 먹고, 통무가 담긴 통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깝게 또 버리겠네.. 이래서 음식 안 받겠다고 한 건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결혼 후, 특히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부모님은 이것저것 음식과 제철과일을 보내신다.
어떤 날은 홈쇼핑에서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을 봤다며-
어떤 날은 음식을 만들었는데 빨리 가져다주지 않으면 상할 것 같다며-
또 어떤 날은 새로 개발한 요리가 있는데 맛있으니 꼭 먹어보라는 말과 함께-
레퍼토리는 늘 바뀌지만 마음은 하나다.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 없이 홀로 육아 중인 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것이겠지. 나도 엄마가 되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 자식이었어도 필시 그럴 테니까.
문제는 두 분 다 손이 너무 크다는 것.
두 식구가 감당하기에는 양이 과하고, 결국 절반 이상은 먹지도 못한 채 버려진다.
사정을 말씀드리면 엄마는 "버리면 되지~!"라고 하시겠지만, 버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죄책감이 남고 속이 쓰리다. 멸치볶음 하나를 만드는데도 재료 고르기부터 만드는 과정까지 뭐 하나 허투루 보내는 것이 없는 부모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받는 것이 영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남들은 배가 불렀다고 할지 모르지만, 받는 입장과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은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2인 가족 겨우 밥 해 먹고살고 있으며, 그렇다고 뱃골이 커서 먹방 유튜버들처럼 한 끼 식사에 음식들을 다 작살내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처럼 삼시세끼 다 챙겨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참다 참다 결국은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며 이런 문제들까지 안고 있어서 가끔은 버겁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이해해 주시고 그 후로 보내주시는 빈도가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제철 재료나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엄마는 어김없이 나에게 연락을 주신다. 좋은 재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떨어져 있는 딸이 생각나시나 보다. 좋은 것은 자식들에게 먼저 주고 싶은 그 본능 같은 사랑. 어쩌면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바통 터치일지도 모른다.
다시 작년 동치미로 돌아와서 급하게 엄마(a.k.a 대대장님)에게 sos를 쳤다.
며칠 후 집에 도착한 대대장님께서는 제일 먼저 통무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셨고, 우리는 서둘러 간담회를 열었다. 작전명 '동치미 일병 구하기'.
다행히 통무는 짜지 않고 동치미 국물이 잘 베여 있어 감칠맛이 살아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그냥 무쳐 먹자. 들기름에 볶아서 지져 먹어도 맛있겠네.
응? 잠깐만, 무청을? 들기름에?
동치미 국물에 빠져있던 건데 짜지 않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무청은 정말 좋아하는 재료 중 하나였고, 게다가 들기름? 흑백요리사에 잠깐 출현해 핫이슈가 되었던 "나야, 들기름"에 그 들기름?!
잠자고 있던 요리 욕심이 꿈틀대는 순간이었다. 나의 도전 정신에 불을 활활 지피고 바람같이 퇴장하신 대대장님을 뒤로한 채 나는 칼을 들었다.
<무청된장지짐>
- 무청에 들기름(1), 다진 마늘(1), 된장(1), 고춧가루(1), 미림(0.5), 들깻가루(0.5) 등을 넣어 무친다.
- 버무린 무청에 육수(쌀뜨물+멸치+새우가루(0.5))를 붓고 센불>중 약불로 조리듯 끓인다.
- 완성될 무렵 청양고추와 파를 넣고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졸여준다.
*기호에 따라 다른 채소를 곁들일 수 있음.
(식감을 위해 버섯을 추가했습니다.)
결과는? 말해 뭐 해. 들기름으로 볶은 건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맛이지.
짤 줄 알았던 무청은 된장과 어우러져 구수했고, 동치미 특유의 감칠맛이 더해져 깊은 맛이 났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었던 '동치미 일병 구하기' 대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무청을 볶으며 문득 재작년에 진행하려다 엎어진 수업이 떠올랐다.
이름하여 '식사이클링 챌린지'.
교과 특성을 살린 프로젝트 수업을 위해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것으로,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환경 보호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눈여겨보던 것이었다. 교과 특성상 보고서 중심 수업이 되어야 했기에 끝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언제고 다시 꺼내고 싶은 수업 아이템 중 하나였다.
식사이클링이란,
식+리사이클링의 합성어로 자투리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통해 음식물의 폐기물을 저감 하는 것이다. 식사이클링을 통해 음식물 낭비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 등의 환경 문제를 줄이기 위해 시작한 푸드리사이클링이다.
버려질뻔한 동치미 무청은 결국 자기 역할을 톡톡이 해냈다.
약간의 손질과 정성으로 근사한 반찬으로 다시 태어났다.
갓 지은 밥에 무청된장지짐을 올리고, 고추장 한 스푼, 참기름 한 바퀴 돌리면 완성-
그것만으로 한 그릇 뚝딱이다.
그날 나는 역방쿠에 올려진 아이 앞에 앉아 밥을 비비며 일장연설을 했다.
-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지.
살다 보면 네가 기대했던 인생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어. 자투리 식재료처럼 내몰리고 깨지고
버려지는 경우도 허다하고 말이야.
그래도, 그런 와중에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꼭 있어. 너는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혹시라도 삶이 마음대로 요리가 되지 않을 때는 우울해하지 말고 뭐라도 해봐. 작고 하찮아 보여도, 창피하
고 바보 같은 짓 같아 보여도 괜찮아. 그냥 시작하면 돼.
시간이 흘러 이불을 뻥뻥 차고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너의 삶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이 무청 한 조각이
될 수도 있어. 혹시 또 알아? 그걸 살리면 내 인생이 리사이클링이 아니라 업사이클링이 될지도 모르지.
암.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