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픔에 대처하지 못하던 어리고 미숙한 내가 불쑥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슬픔이 돌덩이가 되어 마음강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내 마음은 흐르다가 멈춘다. 돌덩이에 막힌 마음강은 유속이 느려지고 슬픔은 불어나기 시작한다.
그럴 때 나는 책과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선다. 무작정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린다. 막힌 마음이 뚫려서 흐르길 바라는 것처럼.
슬픔이 오래 머물기를 바라지 않지만 억지로 흘려보내고 나면 빈 공간이 한동안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빛과 어둠을 생각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다면 기쁨이 있는 곳에는 슬픔도 있고, 슬픔이 있어 기쁨은 더 빛나지 않겠냐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슬픔을 전이시키지 않고 어떻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
숲 카페가 생각났다. 메타세쿼이아 숲 한가운데 앉아 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목을 뽑고 바라보다 글을 쓰고 싶었다.
멈췄던 차를 다시 운전해 숲카페에 도착했다. 슬픔이 묻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마음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맑은 강물이 흘러 내려와 슬픔에 뿌옇게 물든 강물을 덮었다. 빈 공간 없이 잘 메워주었다.
내면에 자리한 나의 슬픔이 이야기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풀어낼 이야기가 많으니 자판을 두드려 써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마음이 슬픔으로 물든 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슬픔과 아픔이 다음에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어주는 끈이 되어줄 거라고.
잘 견디고 있으면 그 힘으로 일어나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 슬픔으로 말미암아 잔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소중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잔잔한 일상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감사할 수 있을 거라고.
나의 슬픔을 풀어낼 곳을 가지고 있는 한
슬픔을 흘려보낼 큰 바다를 간직하는 한(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삶은 어느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슬픔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라라크루 [금요문장: 금요일의 문장 공부]
정면만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들의 옆얼굴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거나 멍하니 생각에 잠긴 옆얼굴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이 사람,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수없이 봐온 사람임에도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옆얼굴엔 그(그녀)의 이면이랄까 본모습이랄까, 전혀 다른 얼굴이 있다. 정면에선 보이지 않던 슬픔이나 매력, 혹은 말 못 할 비밀. 그에게도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고 놀란다. 그런 이유로, 한쪽 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될 일이다.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볼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