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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Dec 25. 2022

술빵, 뭐라도 넣을 걸 그랬다.

그래도 제빵계의 평양냉면쯤은 된 것 같은데...

  집에서 한없이 뒹굴거리던 크리스마스 날. 뜬금없이 속초에 여행 가서 먹은 술빵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이따금 아랫목에 이불을 옴팡 뒤집어쓴 냄비를 두셨다. 그리고 그 냄비가 사라지면 꼭 술빵이 나왔다. 바늘과 실처럼, 술빵에는 항상 어릴 때의 그 기억이 세트로 떠오른다. 술빵을 먹는 것인지,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지 헷갈릴 만큼.  그 추억이 떠오르자, '나도 이제 해볼 법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 때가 가장 무서운 순간이다. 실패하면 그 음식은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게 되니까.

   일단 유튜브를 틀어서 찬찬히 술빵 조리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술빵 만드는 동영상으로 넘긴다. 여러 영상 중에 검버섯이 곱게 피어있는 팔로 술빵을 만드는 동영상이 보였다. 옳거니! 이 조리법이라면 옛 추억의 맛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역시, 이미지의 힘이란!

  집 앞 슈퍼에서 필요한 재료를 다 사 왔다. 끝까지 고민이 된 건 술빵 안에 무엇을 함께 넣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옥수수를 넣으면 물기 때문에 반죽이 질어져 처음 만드는 술빵을 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건포도를 넣자니, 건포도는  영 내키지 않는다. 그래, 플레인으로 만들어 보지 뭐! 이 정도 조리법 정도야 변형해도 상관없겠지, 후후

이윽고 내가 밀가루를 탈탈 털어 만든 반죽을 발효시키고 있자, 남편이 쓱 와서 말을 건넨다.

술빵에 건포도 넣었어? 나 건포도 좋아하는데"

아... 미리 말했다면 아까 슈퍼에서 사 왔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건, 건포도는 술빵을 찌기 직전에 넣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건포도는 발효 안 시켜도 되니까, 이따 빵 찌기 전에 넣을게. 그리고 어차피 신랑은 오늘 못 먹어, 저 빵 발효시키는 데 5시간 걸리는데 그럼 신랑 야간 근무 출근하고 나서니까. 내일 아침에 퇴근하고 먹으면 돼"




...... 차라리 남편이 얘기했던 그때라도 건포도를 사 와서 넣었어야 했다. 

  찜기에 쪄서 나온 술빵은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민숭맨숭했다. 건포도가 없으니 이게 술빵인지, 밀가루 떡인지 구별마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맛은 괜찮겠지? 할머니의 전통 비법을 따랐으니 하며 살짝 먹어보니 술빵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끝에 은근히 달달한 맛이 그나마 이게 빵이었지 싶은 정도랄까?

큰 아들이 한 입 먹어본다

엄마, 이 빵 아무 맛도 안 나. 무 맛이야"

  아들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단다. 엄마도 방금 먹어봤거든. 이 모든 게 플레인 술빵을 계획한 나의 오판이자, 찌기 전에 건포도를 넣는 걸 잊은 내 실수이다.

  '그래, 빵 하나 더 만들어서 밤새 발효시키고 아침에 찌면 딱 되겠다! 얼른 건포도를 사 와야겠다.'

  나는 부리나케 마트에 가서 건포도를 사 왔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며 깨달았다.

 '아, 아까 술빵 만들 때 밀가루 다 써서 남은 밀가루가 없지!'

  으아... 오늘 술빵은 여러모로 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아무 맛이 나지 않는다는 술빵을 아들이 계속 집어 먹으러 온다는 것이다.

 엄마, 이 빵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왜 자꾸 땡기지? 왜야?"

  왜긴 왜야~ 얘가 건포도는 빠졌어도 엄연히 술빵이니까 그렇지! 뭐랄까...? 평양냉면 처음 먹으면 슴슴하고 아무 맛이 안 나는데 며칠 뒤에 갑자기 또 먹고 싶어 지듯 이 플레인 술빵도 그런 맛이랄까? 

  이 와중에 이 사태(?)를 전화로 들은 남편은

  건포도 안 넣으면 맛이 없지! 아이고, 어쩔 수 없지. 내가 먹을게. 근데 잠깐만!  술빵은 찌면 부풀어 오르잖아?"

맞아, 신랑! 부풀어 올라서 맛없는 술빵이 2배로 양이 늘어났어. 다음엔 꼭 건포도 넣어서 맛있는 빵을 2배로 부풀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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