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보다 내가 한비한테 잘하는 것 같아서"
이제 한비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하진이 자주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나는 한비와 만나는 일이 많아졌다. 한비는 내 앞에서 핸드폰을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문자 보관함을 열어 주하진이 보냈었던 사랑고백들을 쳐다보며 다음 사랑고백 문자를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기다리다 못 참고 연락을 보내는 편은 한비였다. 연락을 해도, 연락을 안 해도, 한비는 불안했다.
“내가 너무 하진이한테 부담을 줬나?”
“내가 하진이한테 너무 들이댄 걸까?
한비는 스스로를 의심하며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기 시작했다.
한비가 왜 자기 탓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더 사랑하고 애쓴 쪽은 한비인데. 나는 입술을 깨물며 주하진을 생각했다.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고.
개학-
방학이 끝나고, 다시 등교가 시작됐다. 방학이 지루해서 어서 학교를 가고 싶었다는 둥, 방학이 너무 짧았다고 더운데 가을에 개학하면 좋겠다는 둥, 저마다 하는 말과는 다르게 한껏 상기된 표정과 밝은 미소로 교실에 들어와 삼삼오오 모여 실컷 떠들어댔다.
“소라야!”
한비가 손을 흔들며 내 옆으로 왔다. 같은 여자지만 한비한테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한비를 가볍게 안아주고 가방을 받아줬다. 그리고 한비는 곧장 주하진에게로 갔다.
주하진은 한비의 인사에 대충 웃어주고 남자애들에게 갔다. 나는 주하진의 웃음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 웃음은 귀에 걸리는 미소가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낸 미소였다. 눈빛도 달랐다. 한비를 바라보던 반짝이는 눈이 아니라 한비를 훑어보고 넘기는 눈이었다. 확실히 주하진은 방학 때보다 더 무심해졌다. 나는 그 모든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한비의 다정한 접근에도 주하진은 대충 웃거나 짧게 “응”하고 말았다. 책상 위에 둘만이 쓰던 펜과 쪽지를 올려둬도, 별 반응 없이 주머니에 넣을 뿐 돌아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 한비가 주하진의 어깨를 툭 치며 장난을 걸었을 때, 주하진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역시 주하진은 분명히 변했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주하진은 더 제멋대로가 되어 있었다. 주하진이 한비를 어느 정도 좋아하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 감정이 한비만을 사랑하는 느낌이 아니라, 한비의 호감과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을 즐기는 쪽의 느낌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한비가 없을 때 나는 주하진 앞에 섰다.
“뭐야?”
주하진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넌 한비 좋아하는 거 맞냐?”
“... 뭔 소리야.”
“너, 한비한테 받기만 하지?”
주하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너가 한비한테 뭐 주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나는 팔짱을 끼고, 준비한 말을 했다.
“괜히 시비 걸지 말고 가”
“너도 받기만 하잖아. 너나 잘해줘.”
주하진은 비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약간 붉어진 얼굴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는 게 보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준비한 말을 던졌다.
“너보다 잘하는 것 같아서. 한비한테 잘해라.”
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그걸 보고 돌아섰다.
교실문을 닫고, 유리창 너머로 주하진을 바라봤다. 주하진은 손에 들고 있던 우유갑을 힘주어 구겼다.
팍-
그 안에 남은 공기와 우유가 섞이며 거품이 일었다. 오후라 냄새가 나기 시작한 우유 거품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하진은 거칠게 서랍에서 가정통신문 몇 장을 꺼내 손을 대충 닦았다. 그리고, 우유갑을 교실 바닥에 집어던졌다.
텅-
“씨발, 뭔데 참견이야.”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주하진은 자신이 너무 오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눈치를 살폈다. 애써 모른 척하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창가로 갔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저건 한비가 점심때 주하진 서랍에 넣어둔 초콜릿이었다. 주하진은 껍질을 벗기면서도, 표정을 잔뜩 구겼다.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뚝뚝 부러뜨려 입에 욱여넣고 씹어댔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었는데, 꼭 뭔가를 씹어 삼키며 참는 사람처럼.
나는 피식 웃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럴 줄 알았기에 나오는 쓴웃음과 한숨이었다.
역시, 나는 이 연애가 어디로 갈지 알 것만 같다.
<계속, 매주 2편씩 올립니다>
(Image. @sh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