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김춘수, <꽃>
김춘수의 <꽃>을 가르치는 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듣기만 해도 설레고 말랑해지는 이 좋은 시를, 가르칠 게 뭣이 있단 말인가. 잘못했다가는 이 좋은 시를 망치기 십상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연의 ‘그’는 누구일까? 구석에 조용히 있던 학생이 ‘선생님’이라고 적었다. 선생님이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지만 자기는 알아듣지 못하니 선생님의 가르침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오-’ 아이들은 진심어린 찬사를 보냈다. 오- 시를 읽을 줄 아는 놈이네. 덕분에 수업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 나도 너희들에게 어쩌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겠구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몸짓에 불과하던 그가 꽃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건 그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 그의 ‘빛깔’을 보고 ‘향기’를 맡게 되었다는 것,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 경험이 있는가? 아이들은 거의 YES라고 답했다.
자신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이 있는가? 아이들은 거의 NO라고 답했다. 나도 그렇다. 학교에서 만난 수많은 아이들 중 몇은 ‘이름’을 불러 주어 다가와 꽃이 되었다. 꽃이 된 아이들 가끔 보고 싶다.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준 사람…… 나도 아이들처럼 NO라고 답한다. 나는 이름을 불러 주었는데 나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이 없다 …… 돌아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는 것, 나의 착각일지 모른다.
시험기간이라 나름 애쓰다 잠든 아들을 쓰다듬어 본다. 아들의 빛깔과 향기를 나는 인식하고 있는가. 민들레꽃인 아이를 해바라기꽃으로 알고 잘못 부르지는 않았나. ‘자신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이 있는가?’라고 아들이 학교에서 같은 질문을 받으면 ‘엄마’라고 답할 수 있을까. 매일 밤 늦게 돌아와 어항 앞에 앉아 구피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인 남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지도 못한 것 같다. 그의 ‘빛깔’을 보지 못하고 그의 ‘향기’를 맡지 못한 일상이 더 많았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선생님이 되지 않기를 소망하며, ‘꽃’을 다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