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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Jan 05. 2024

이토록 재미있는 겨울 산이라니!

- 41구간 닭목령 - 대관령을 걷다.

날씨예보가 최저기온 -17도였다. 바람은 초속 5m/s다. 바람 1에 -2도씩 떨어지니 -30였다. 2023년 마지막 산행을 그대로 갈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오갔다. 12월 23일 산행에서 돌아와서는 송년회도 예정되어 있었다. 분주하게 이루어지던 산행준비팀과 송년회팀이 조용해졌다. 대장단 카톡방에는 날씨에 대한 염려가 오갔다.

한 달 전, 11월 말에 겨울 첫 산행에서 모두 호되게 데인 터였다. 초반 컨디션이 안 좋은 대원들을 중간 탈출로를 통해 내려보내고도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결국 새벽 산행이 야간 산행으로 끝났다. 늘 담담하게 맨 끝으로 내려와 산행종료 선언을 하던 후미대장님이 처음으로 힘들다는 말을 했다. 가장 힘든 건 추위였다. 손 발이 계속 시렸다. 손은 속장갑을 끼고 겉장갑을 더 끼면서 사이에 핫팩을 넣고 간 사람만 괜찮았다. 발은 등산화 바닥에 깔창 핫팩을 깔고 간 사람만 자기는 괜찮았다고 했다. 뭘 이런 거까지 필요해했던 것들이 다 필요한 바로 그 하루였다. 몸에 붙인 핫팩이 버스에선 더웠는데 버스 밖에서는 나를 살렸다. 얼굴 전체를 눈만 나오게 씌워주는 바나클라바를 준비 안 한 사람은 찬 바람 계속 맞은 얼굴이 아프다고 했다. 혹독하게 당하고 돌아온 첫겨울 산행 이후에 남은 겨울 산행 코스가 조정되었다. 여름에는 여름산행이 제일 어려운 줄 알았는데 겨울산행에 비길 게 아니었다. 여름 산행은 출발 시간을 당기면 되었다. 가장 뜨겁기 전에 하산하려고 새벽 1시에 출발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겨울 산행은 그럴 수 없다. 제약이 더 많다.


결국 산행이 한 주 미뤄졌다. 그래서 2023년의 마지막 산행은 12월 30일이 되었다. 매일 대관령의 날씨예보를 봤다. 날은 점점 좋아져서 최저기온 -4에 바람도 없다고 나왔다. 일정을 미룬 보람이 있었다. 다만 오후 1시 이후에 눈 예보가 있었다. 눈 예보 때문에 들머리였던 대관령에 도착해서 제설이 되는 이곳을 날머리로 바꾸자는 기사님 의견에 다시 닭목령으로 산행 출발시간이 한 시간가량 미뤄졌다. 산행을 시작할 땐 7시가 넘어 이미 해가 다 떴다.  

뽀드득, 투두둑, 눈 밭 소리

길이 온통 하얗다. 밟을 때마다 뽀도독, 투두둑 소리가 경쾌하게 올라온다. 언덕에 올라오니 눈 닿는 곳이 모두 하얗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들린다. 어른들은 모여 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조금 더 언덕을 찾아 발자국을 찍고 다닌다. 걷기만 하던 산이 놀거리 투성이 인 곳으로 바뀌었다. 이래서 겨울 산행은 오래 걸리는구나!


날도 좋고 겨울 산 대비도 잘 되었지만 무엇보다 코스가 무난했다. 눈에 발이 빠져서 걷는 속도는 더뎠지만 오늘 산행은 선두와 후미 모두 순항했다. 오늘 구간은 13km밖에 되지 않아 겨울만 아니라면 아침에 시작해 점심이면 끝났을 거다. 그런데 예보와 달리 눈이 빨리 내리기 시작했다. 하산 마지막 한 시간 정도 눈 맞는 걸 예상했는데 중반부터 내렸다. 추운 줄 모르고 갔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니 추워졌다. 눈 발 내리는 속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준비해 온 차량용 비닐커버를 펼쳐 삼삼 오오 들어앉았다. 비닐 끝을 엉덩이로 깔고 앉으면 그 안은 따뜻하다. 해라도 떠 있으면 더 따뜻하다.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집에서처럼 면이 부들부들 해 지지는 않지만 먹을만하다. 국물이 속을 뜨끈하게 해 준다. 비닐에 못 들어간 대장님들은 은행나무 침대 영화 속 황장군처럼 눈을 소복이 맞으며 아이들이 다 밥 먹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이 걷는 대원들의 몸 곳곳에 소복이 쌓여갔다.  

하산길을 엉금엉금 가다가 누군가 엉덩이로 앉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산 스틱을 스키 폴대처럼 써서 양 옆을 밀어주며 가니 더 잘 갔다. 엉덩이 눈썰매 가져온 어린이가 제일 멀리까지 앉은 채로 갔다. 제일 부러웠다. 아이젠 낀 발 때문에 브레이크가 걸려 멈추기도 하고 삐죽 나온 돌멩이에 엉덩이를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재밌었다. 내리막만 나오면 환호성을 지르며 앉아갔다. 점점 엉덩이 썰매 인원이 늘었다. 겨울 산이 이토록 재밌을 줄이야!


첫겨울 산행에서 놀라 남은 겨울 산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했었는데 겨울 산을 즐기는 법을 터득했다.  이제 다음 겨울산행이 기다려진다. 나도 엉덩이 썰매를 꼭 가져갈 것이다. 겨울 산행이 두 번 밖에 안 남았다니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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